청취자에게 말 거는 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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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에게 말 거는 선곡 
'아침에 적절한 노래' 찾다가 '웃기는 선곡'으로 기준이 바뀐 이유
  • 하정민 MBC PD
  • 승인 2019.07.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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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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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하정민 MBC PD] 연출론을 운운하기엔 부끄러운 입장이지만, 라디오 PD의 연출 중엔 ‘선곡’이 꽤 중요하다. 기가 막히게 상황을 잘 연출해놓고도 분위기를 한방에 망칠 수 있는 게 바로 이어붙인 노래 한 곡이다. 

어떤 노래를 골라 어떤 순간에 틀 것인가. 거기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이야기 흐름, 분위기, 감정선, 그리고 날씨까지 고려해 딱 한 곡을 선택한다. 이후 곡이 재생되는 순간부터 3~4분간은 꼼짝없이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망한 선곡 뒤엔 멋쩍게 그 몇 분을 견뎌야한다. 괴로운 일이다. 전전긍긍, 출연자와 작가들 눈치를 보다가 곡의 주인에게까지 사죄하고 싶어진다. 이 순간 좋은 노래 한 곡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마냥 달갑지 않은 반응을 얻게 되는 건 오로지 내 탓이니까.

조연출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선곡표를 짜서 선배에게 숙제 검사받듯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선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네 선곡에는 결이 있구나.’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쏭달쏭한 상황에서 음악은 나갔다. 결이 있다는 건 뭐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또 다른 선배는 “잘난 척 하지 말고 5천만 중에 최소 2천만은 아는 노래를 틀도록 해”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망했다는 감각조차 없던 시절, 여러 차례 망해보면서 아, 이번 선곡은 망했구나, 공감을 사지 못 했구나 조금씩 깨달아 가던 시절이었다. 나의 결이나 음악 취향 혹은 고집보다 일단은 청취자 반응을 제대로 읽는 것부터가 시작이구나.

서로 다른 두 곡을 한 곡처럼 붙이는 기교를 최고로 치던 시절도 있었다. 정서가 비슷하거나 혹은 다르더라도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곡들이 있다. 서로 만난 적 없는 두 곡을 나름 정교한 시차를 두고 붙여 틀었을 때 발생하는 감동에 취했었다. 몇 곡을 이어듣곤 하는 긴 호흡의 심야 프로그램 시절 일이다. 알아주는 사람은 적더라도 나름의 진지한 도전 과제여서 신곡을 들을 때마다 어떤 곡과 맺어줄까 고민하며 메모를 자주했다.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프로그램 선곡 만족도가 높게 나왔을 때 무척 기뻤다. 청취율을 더 챙겼어야 하는데...

아침 프로그램을 맡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일찍 일어날 걱정보다는 선곡부터 고민했다. 출근길 라디오는 생활감이 중요할 텐데, 어떤 음악이 맞을까? 출근 시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모니터를 해봤다. 잠은 덜 깨고 정신은 혼미한데, 마음은 바빴다. 하나같이 피곤해보였다. 누구나 흥얼거릴만한 노래가 좋겠구나, 일정한 템포를 놓치면 바로 쳐지게 들리겠구나, 나름의 몇 가지 결론을 가지고 방송을 시작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가장 대중적인 시간대에 공감을 끌어내는 건 무척 공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나마 최근 가장 뿌듯(?)했던 반응은 ‘저 세상 선곡이네~’였다. 요즘 유행어를 활용한 평이 왔다는 게 흡족했다. 음, 트렌디한(?) 분께서 재밌어해주시네-하는 바보같은 만족감이다. 에세이 코너에서 마라탕 얘기를 한참하고 나선 노사연의 ‘만남’을 붙였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고민 끝에 에라 모르겠다 틀어버린 노래다. 가사 속에 ‘마라(사실 ‘말아’가 맞는 말이다)’가 등장할 때마다 다행히 재밌어 해주셨다.

모기와 관련한 얘기를 한 날엔 레드벨벳의 ‘빨간 맛’. ‘빠빠빠 빨간 맛 궁금해 허니...(중략)...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름 그 맛, 여름의 너’. 적다보니 으스스하긴 한데, 가사가 모기의 시각에서 딱 맞아 틀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론 에세이 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이어서 어떤 곡이 나올지 추측하는 문자가 쏟아진다. 

무리수를 몇 번 던진 뒤로 청취자들과 심리전이 시작됐다. ‘어떤 곡이 가장 아침에 적절한가’에서 ‘어떤 곡이 가장 웃길 수 있는가’가 최대의 고민이 됐다. 누구나 예측 가능하고 뻔하면 김이 훅 빠지고, 선을 넘어 너무 비틀거나 멀리가면 반응이 떨떠름하다. 대부분에게 생소한 곡인데 제목이나 가사가 닮았다고 붙이는 것도 반칙이다. 듣는 순간, 아하! 하며 피식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승패는 노래가 나가는 순간 바로 결정된다. 머릿속에 실로폰 소리가 들린다. 이번 건 땡! 입니다. 여지없이 반응이 없다. 문자창이 조용하다. 어, 이번 건 괜찮은데? 딩동댕! ‘ㅋㅋㅋ’가 쏟아진다. ‘이 노래 틀려고 이런 에세이 썼죠?’란 문자까지 온다.(아니다)

뻔뻔함만 늘어 가는지 실로폰 소리가 두렵지가 않다. 잘 풀리면 한껏 우쭐대고 망하면 망한 대로 자학을 우스갯거리로 삼는다. 이전까진 시험 보듯 이게 맞을지 저게 맞을지 고민하며 선곡의 답안지를 적어내려갔는데, 요즘엔 돗자리 깔고 청취자와 함께 어울려 노는 기분이다. “아, 이번 건 별로였어요? 다음엔 진짜 정신 차리고 잘 해볼게요.”, “괜찮았다고요? 다음엔 더 웃길게요, 내일도 들어주세요!” 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여유가 생긴 건지, 방만한 PD가 된 건지는 어차피 얼마 지나봐야 깨닫게 될 거다. 어차피 고품격 음악전문PD가 되기는 글렀으니 (아무리 연구해봐도 안 된다), 이렇게라도 청취자들에게 말 걸고 재롱부리며 시간을 보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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