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중산층, 날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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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16] ‘맞벌이의 함정’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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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1997년은 잔인한 해였다.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를 잃었다. 남은 것은 약간의 퇴직금뿐이었다. 조금씩 돈을 모아 서울 근교 신도시로 이사를 오며 아버지가 키워왔던 중산층의 꿈은 증발해버렸다. 그날 이후 꽤 오랜 시간동안 집안의 모든 물건들은 반강제로 수명이 연장됐다. 마치 나의 집만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새로이 시작한 사업이 금세 자리를 잡았고, 가족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산 덕분에 대출이 가족들을 집어삼키게 하진 않았다. 하지만 IMF라는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 고개를 들자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다들 가라앉거나 무너졌고, 그나마 몇몇 사람들만 간신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살아남았지만, 그 대가는 적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업을 하거나 공장으로 향했고, 아버지는 과로와 과음을 피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교육비와 의료비를 지원받을 때, 나는 대출 규모를 줄이기 위해 등록금이 싼 학교를 가고자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모든 것이 그나마 잘 풀려서, 우리는 작은 조각배 하나를 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배에 의존해 어쨌든 몇 번의 파도를 타고 넘었다. 이제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고, 어머니의 몸은 조금씩 닳았다. 배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파도가 한 번 더 들이쳤을 때, 우리가 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불안감은 그러니 우리들의 가장 바닥에 깔려있는 감정이다. 언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그 때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다들 필사적으로 살아남고자 버둥거린다. 많은 젊은 부부가 가능하다면 둘 모두 벌기를 원하고,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실탄을 비축하길 바란다. 조금 더 안전한 곳, 조금 더 안전한 삶을 위해서.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그렇게 더 버둥거리면 더 안전해질까. 사실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맞벌이 가정이 홑벌이 가정에 비해 더 많이 저축하는 게 아니라 빚만 더 많다는 조사 결과는 이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어떤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맞벌이의 함정>은 그 의문에 답을 얻기 위해 집어든 책이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출마 선언을 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2003년 자신의 딸과 함께 미국 중산층 몰락의 원인과 방지 대책을 논하는 이 책을 썼다. 자신의 가족도 이미 한 번 몰락의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 데다, 정치인이 되기 전 파산법 전문가로서 파산 가정들의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좀 더 직관적으로 위기를 감지하였는지도 모른다.

워런이 보기에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자신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했지만, 불행히도 그 노력 때문에 더욱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다. 정부가 공교육과 공공의료보험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내려놓은 사이,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자녀의 교육과 안전을 위해 사립학교를 선택하고,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고, 비싼 개인 의료보험을 구매해야 했다.

이를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돈이 점차 늘어날 때 각 가정의 전업주부들은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무사히 공부를 하더라도 좋은 대학교를 갈만한 성적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불안함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워런이 보기에 중산층 가정은 자신들에게 닥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소득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그 소득으로 얻어내려 했던 좋은 집과 좋은 학교의 가격은 입찰 경쟁이 격화되면서 더욱 비싸졌다. 대출 이자 규제 완화는 이 비싼 재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게 했고, 결과적으로 가계 소득은 대출금 변제와 사교육비, 주택비로 흘러나갔다. 

이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참혹했다. 각 가정은 과거 세대에 비해 더 많은 수입을 얻지만, 막상 그 수입에서 고정적인 비용을 제외하면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부부 중 한 명이 갑작스레 해고되거나, 누군가 질병으로 인해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계 재정은 금세 적자로 돌아서게 될 것이고, 대부업체들의 태도는 돌변할 것이다.

워런은 이제 많은 가정이 함정에 빠졌다고 분석한다. 조금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 모두가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그로 인해 가정은 더욱 위험에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서 돌봄 노동을 담당하고 노동예비군의 역할을 맡으면 되는 문제일까?

워런은 여성이 가정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경제적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여성운동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는 게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정 내에서 전업주부가 제공하던 안전망의 가치를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서든 제대로 조명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워런의 대안이 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안전망을 제공하고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금융업체의 탐욕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소비자운동이나 개별 가정의 움직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13년 만에 개정판을 내며 미국의 중산층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한 것도, 대선 후보 출마 선언에서 모두를 위한 미국을 위해 이제 일어나야 한다고 외친 것도 이제는 좀 더 큰 권력으로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은 아닐까.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모습의 낭떠러지 끝에 매달려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정치인이 아닐까. 시간은 우리에게도 없다. 그 촉박함을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촉박함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의 윤곽을 드러내고, 권력을 선하게 쓰기를 요청할 수 있다면, 내가 만드는 교양 프로그램이 그런 역할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사라져간 나의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조금은 덜 부끄러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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