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라고요? 차별적 발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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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 라고요? 차별적 발언입니다 
[비필독도서 17] '선량한 차별주의자'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9.08.08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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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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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회사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장 힘들었던 일들 중 하나는 뜬금없게도 점심 메뉴 고르기였다.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면 구내식당은 물리고, 주변 식당들도 거의 단골이 되어버리는지라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는 날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나. 그러나 그건 신입인 나도 마찬가지여서, 점심 메뉴를 고르는 건지 원서 접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놀림도 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제가 좀 결정장애가 있어서요……”라는 말로 눙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러던 며칠 전 평소처럼 지난한 메뉴 선택의 시간을 보낸 후, 서점을 거닐다가 소화도 시킬겸 신간 코너에 놓인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집어 들었다. 책은 ‘결정장애’라는 말을 무심코 썼다가 지적받았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머리말을 다 읽고 나자 부끄러워졌다. 차별은 별다른 생각 없이 쓰는 말들 안에 있었고, 나는 무심히도 그런 말들을 내뱉어왔기 때문이다. 꽤나 조심하며 살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꽤나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설마 내가 차별을 행하랴’ 생각하지만, 종종 차별은 일상적인 말들 속에서 불현듯 나타난다. 바다 건너 아이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고, 매달 헌혈을 하며 수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도 눈앞에 있는 휠체어 탄 장애인이 버스를 타지 못하는 것에 무감하고, 외국인 노동자가 여권을 뺏긴 채 일하는 데 무감할 수 있다. KKK처럼 흰 망토를 입어야만 차별을 행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조합이 그리 불가능한 게 아니며, 오히려 이 모습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수자나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이름이 아닌 수많은 이름들로 이루어진 꽤나 복잡한 존재다. 마치 건물처럼, 1층에선 남성으로서의 내가 있고, 2층에는 한국인으로서의 내가 있으며, 3층에는 이성애자라는 내가 있다. 우리는 승강기를 타고 층 사이를 이동하듯, 내게 붙여진 이름들 사이를 이동한다.

그런데 종종 승강기는 내가 원하지 않는 층수에 머물기도 한다. 유럽이나 미국에 나가면 나는 언제나 4층 ‘황인종’의 이름을 달고 나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라는 건물에 붙여진 어떤 이름들은 때로는 유리하고, 때로는 불리하다. 이름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건 그 이름들이 내게 유리한 경우에 한한다. 불리한 이름으로 구태여 갈아타는 수고를 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곳엔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민감하지만, 차별의 주체가 되는 것엔 비교적 둔감하다. 이름의 층위를 횡단하며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받는) 차별에 저항함으로써 ‘선량한 사람’이 되지만, 동시에 (자신이 행하는) 차별에 눈감음으로써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는 않는 ‘차별주의자’가 된다. 그것이 종종 진보적인 사람이든 보수적인 사람이든 저지르는 모순이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보통, 어느 한 영역에서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영역에서 약자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연대는 그런 예민함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연대는 종종 ‘어울림의 공포’ 앞에서 무너진다. 힘을 가진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버려지고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 사람들은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수자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찾는다. 연대보다는 기생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공포를 극복하고 조금 더 밑바닥에 있는 ‘평등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킬 장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그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은 존 롤즈의 ‘무지의 장막’이다. 그는 우리가 만약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채로 사회계약을 맺는다면, 가장 약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배려가 돌아갈 수 있는 형태의 계약이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내가 사실 가장 약한 존재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이름의 건물이 어떤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섣불리 어떤 이름들을 경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혹은 불리한 위치에 있는지를 잘 안다. 각자의 처지를 모른 채 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는 건 어렵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법과 제도의 개편이다. 각자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영역들에서 새로운 계약을 위한 사유 실험들이 좀 더 활발해져야 한다. 그만큼 법을 만드는 사람들, 제도를 손보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그들을 더 면밀하게 감시하여 대중들에게 알리는 언론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책의 말마따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무심한 데에서부터 온다. 도덕과 윤리의 대상이 되는 ‘우리’의 범위를 계속해서 넓히고, 그곳에 속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결과는 뻔하다. 악의 없는 무관심이 차별을 얼마나 심화시키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러니 남은 것은 결단과 도약이다. 정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진지충이니 설명충이니 모욕하는 데 관대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혹은 언론은 무엇을 행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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