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리와 불편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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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리와 불편한 소리 
'고성이 오가는 정치 뉴스' '명절 잔소리'...극적인 오디오에 갇힌 사람들이 ‘ASMR'을 찾는 이유 
  • 허항 MBC PD
  • 승인 2019.09.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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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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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허항 MBC PD] 지난 6일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시청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나도 모르게 TV를 꺼버리고 말았다. 후보자에게 질의를 하는 한 의원의 ‘소리’가 너무나 듣기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원의 목소리 자체도 매우 격앙되어 톤이 높아져 있었는데, 쓰는 용어나 단어들이 너무나 인신공격적인 것들이라 시청자인 내 귀에도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물론 청문회에서의 질의란 꼭 필요한 과정이고, 민감한 사안인 만큼 다소 거친 말투가 오갈 수도 있다는 점은 머리로 이해 가능했다. 하지만 나의 귀는 도저히 그 ‘소리들’을 수용해낼 재간이 없었다. 

PD가 처음 됐을 때는 ‘소리’. 즉 ‘오디오’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아둔했다. 모노와 스테레오를 헷갈리고, 비디오에만 신경 쓰느라 오디오 채널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낭패를 본 일도 더러 있었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다행히 방송에서 오디오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끼며, 점점 소리에 민감한 귀를 갖춰갈 수 있었다. 출연자의 말소리와 BGM. 효과음, 관객웃음소리 등 예능 프로그램을 이루는 소리 층들이 조화롭게 섞이지 않으면 시청자도 바로 불편해하며 채널을 돌린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오디오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집 근처인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곳엔 최근까지 모 정당이 천막을 치고 정권 규탄집회를 매일같이 열고 있었다. 대부분의 뉴스에서는 그 정당이 친 천막이 광화문광장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는, ‘비디오적 요소’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 곳에서 발생시키는 ’오디오’였다.

특정 정당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들려오는 말들의 30% 이상이 비속어나 욕설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소리보다, 누군가를 대놓고 비하하는 소리,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극단적인 인신공격 발언 등이 찢어질 듯한 스피커 소리로 증폭되어 퍼졌다.

그 때마다 일상적으로 광화문 사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굳어졌고, 빨리 저 소리에서 벗어나고자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였다. 화창한 여름 오후의 광화문 거리를 한 순간에 불편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며 소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ASMR, 또는 백색소음 같은 잔잔한 일상의 소리들을 일부러 찾아듣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많은 유튜버가 먹는 소리, 바람 소리, 색칠하는 소리 등 지극히 일상적인 소리들을 채집해 콘텐츠로 제공하고, 많은 구독자들이 그것을 소비한다. 클릭해보면, 기승전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반복되는 소리로만 꽉 찬 콘텐츠들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자 하는 몇 만, 몇십 만의 구독자가 있다. 항상 ‘극적인 소리’를 추구하는 예능PD로서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팔로우하는 화가가 제공하는 ‘마카 색칠하는 소리’를 버릇처럼 잘 틀어놓는 ‘ASMR 애청자’ 중 한명이 됐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각사각 반복되는 소리가 신기하게 긴장된 마음을 잠시 안정시켜주고, 때로는 편히 잠들게 한다. 

사실 ‘별 것 아닌 소리’들이 이제 오히려 ‘특별히 듣고 싶은 소리’가 돼가는 것 같다. 고성이 오가는 청문회 소리, 집회에서 나오는 욕설로 점철된 소리가 아니더라도 요즘 사람들의 일상은 항상 극적인 오디오로 둘러싸여 있다. 자극적인 말들로 화제를 모으려는 콘텐츠들, 우울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 리포트들, 짧은 시간 안에 강한 임팩트를 던지고자 강한 효과음을 쓰는 광고들, 명절 잔소리들... 

그런 강렬한 오디오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릇 부딪치는 소리, 낯선 도시의 카페 소리, 깊은 산 속 물소리를 찾아 하염없이 듣곤 한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 눈으로 보는 영상보다 귀로 듣는 소리 콘텐츠를 많이 찾는 이유는 우리의 귀가 마음과 더 예민하게 닿아있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도 잘 자란다는 고전적인 속설을 꺼내지 않더라도, ‘좋은 소리’란 ‘좋은 일상’에 꼭 필요한 요소인 것이 확실하다.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의 수십 분을 모두ASMR 콘텐츠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에 좋은 기운을 주는 소리들을 많이 넣어 만든 프로그램을 구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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