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항일' 해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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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항일' 해녀들
제주MBC 창사 특집 다큐 ‘나는 해녀이다’, 1932년 치열했던 해녀항일운동의 기록
  • 김훈범 제주MBC PD
  • 승인 2019.09.19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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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MBC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해녀이다’.
제주MBC 창사 5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해녀이다’.

[PD저널=김훈범 제주MBC PD] 최근에 PD라는 직업의 매력을 또 한 가지 발견했다. 이 매력이라는 게 고생과 비슷한 개념이긴 하지만, 의도치 않았던 또는 기대하지 않았던 프로그램 제작에서 배우고 감동받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해녀항일운동을 기록한 <나는 해녀이다> 제작이 그랬다.

원래는 다른 창사특집을 기획하고 있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남북관계가 순풍에 돛을 단 듯해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한 전국의 PD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기획안에 대해 고와 스톱을 망설이고 있을 때 제작부장이 ‘던져 준’ 아이템이 해녀항일운동이었다.

87년 전, 제주하고도 구좌읍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당시 주역들은 물론이고 목격자들이 100살이 훨씬 넘은 이 시점에 제작하라니. 게다가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작지원한다고 한다. 솔직히 ‘썰렁한’ 보고서 같은 다큐 하나 만들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료와 논문 읽기를 시작했다. 1932년 238회의 시위, 참여한 해녀들의 연 인원만 1만7천명이라고 했다. 심상치 않았다. 당시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요구에 칼로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 1930년대라고 하면 일제의 전시체제로 총동원기였는데, 그 때 이런 구호를 1만 7천명이 외쳤다니. 가슴이 뛰었고 제주 해녀들이 정말 멋졌다.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자료와 논문에 글로만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60분 분량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서라도 ‘그림’ 확보가 절실했다. 해녀박물관, 제주항일기념관을 찾아갔으나 당시 주역들의 하도야학 졸업사진, 증명사진, 그리고 훈장 모조품, 당시 항쟁을 재연한 모형 정도가 전부였다.

제주MBC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해녀이다’ 스틸컷.
제주MBC 창사 5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해녀이다’ 스틸컷.

혹시 예전 촬영 영상이 있지 않을까. 회사자료 데이터 검색에선 나오는 것이 없었다. 창사51주년 제주MBC의 저력을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회의적인 마음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런 마음으로 며칠 동안 자료실을 뒤졌다. 그러다, 보도국 자료실 구석에서 1987년 제작한 일요리포트 ‘해녀들의 함성’ 테이프(무려 당시에 최신이었을 SP하고도 새 테이프였다.)를 발견했다. 방송본도 아니고 클린본을 발견했을 때 기쁨이란. ‘해녀항쟁을 이끈 어머니들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하고 감격스러웠다.

귀하고 귀한 증언들이 담겨있었다. 해녀질을 했으니까 물고문을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는 증언, 우도에서 항쟁 주모자들을 검거하고 떠나는 배를 해녀들에 물에 들어가 엎어버리려고 했다는 이야기, 채찍에 맞고 피를 쏟아내며 끌려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차라리 그만 외쳤으면 했다는 목격자 증언 등. 당시의 위대한 항쟁이 눈앞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후손 인터뷰, 드라마 재연 등으로 바쁘게 제작을 하던 중에 해녀항일항쟁 기념공연을 촬영했다. 하도해녀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나왔다. ‘나 가진 건 태왁 하나, 나 배운 건 물질 하나, 나 사는 작은 섬을 떠나지 말라고 하네...’, “나는 바다다. 나는 엄마다. 나는 소녀다. 나는 해녀이다...”

서로 도우며 서로를 위로하는 위대한 공동체 문화, 그리고 고된 일을 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제주 해녀의 자부심에는 자랑스러운 해녀항일투쟁의 기억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큐멘터리를 이 하도해녀합창단의 노래로 열고 닫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었다.

지난 17일 방송이 나가고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나에게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당시 뜨겁게 항일을 외쳤지만 기록되지 않은 해녀분들의 평안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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