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팟’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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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팟’의 묘미
[라디오 큐시트]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기념비적인 이유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09.24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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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홈페이지 화면.
MBC 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홈페이지 화면.ⓒMBC

[PD저널=박재철 CBS PD] ‘think different’ 애플의 슬로건이다. 슬로건의 특성에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알리의 일성이 가장 어울린다. 짧고 매서워야 제맛이다.

문법적으로는 differently나 difference를 붙여야 올바를 성싶은데 애플은 굳이 think 뒤에 different라는 형용사를 썼다. 두 단어 사이에 something을 생략한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무엇이든 간에 올곧게 썼으면 오히려 밋밋하지 않았을까 싶다. 비문법적인 슬로건 자체가 규범을 깨고 다름을 창출하겠다는 의지 표출은 아니었을까.

글자 수를 줄이면서 메시지는 더 강해졌다. 좋은 슬로건의 잔상은 자코메티 조각상의 군살 없는 정념과 견줄만하다. 군더더기는 휘발시키고 고갱이만을 남겨 본질을 증류한다.

맞다. 슬로건은 짧지만 강렬할 수 있는 것들을 상기시킨다. 라디오에선 스팟(Spot)이 이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정규 프로그램 사이, 방송사의 휴식시간이 말 그대로 SB(Station Break)다.

방송사는 쉬겠지만 청취자는 움직인다. 이때 채널 변경이 제일 잦다. 프로그램 예고, 안내인 ‘프로모(Promo)’나 협찬, 시보(時報) 그리고 공익성 ‘캠페인’ 등이 주로 이 시간 벨트에 편성된다. 짧게는 3초, 길게는 1분이 되는 각종 구성물들이 줄줄이 엮여있다. 그러다보니 청취자 입장에서는 호의적일 수 없는 청취 구간이다.

편성에 있어서 칠흑이라면 칠흑일 수 있는 이 SB 시간대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다면 제작자나 청취자 모두 행복할 것이다. 짧고 밀도 있는 스팟이 그 별이 될 수 있다.

밤하늘에 한 알 한 알 큼지막한 별을 박아 넣고 아름다운 별자리를 만들 만큼,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빛나는 스팟이 있다. 바로 MBC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다.

요즘 세대에게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패러디 물로 익숙할 테지만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라디오 스팟의 기념비적인 제작물이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먼저 ‘현장성’이다. 1989년부터 10여 년 간을 발품을 팔면서 제작자 최상일 PD는 천 여 곳의 마을을 직접 찾아다녔다. ‘소모는 소리’, ‘통나무 옮기는 소리’, ‘모 찌는 소리’, ‘자장가 소리’ 등 현장에서 직접 채집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소리를 담아와 들려줬다.

기존의 것을 편집한 것이 아닌 현장에서 건져 올린 날것의 사운드가 생생히 담겨 있다. 때론 거칠고 때론 힘차고, 또 때론 애잔했다. 일상적이고 소박하지만 언젠가 기계로 대체되면 사라질 소리들이었다.

하나 둘씩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는 소리에 마이크를 갖다 댔다. 주위에 귀를 기울여보자. 언젠가 소리 박물관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얼마나 될까? 박물관의 귀퉁이 자리조차 차지하지도 못할 소리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 스팟은 그런 소리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헌사이자 애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보여주는 ‘노동성’은 또 어떤가? 노동에 대한 가치 부여 면에서 당대 어떤 프로그램과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는다.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오는 풍경이 사진사의 가치관과 선택의 결과이듯, 세상에 그 많은 소리 중에서 특별히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전했다는 것이 이를 웅변한다.

더불어 여기에 ‘우리의 소리’라 명명했다. ‘노 젓는 소리’, ‘굴 캐는 소리’, ‘적삼 짜는 소리’, ‘해녀들의 숨비 소리’ 등 몸을 부려 하루의 삶을 이어나가는 이들을 소리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는 노동에 대한 존중과 가치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과 노역은 다르다. 자발적인 노동에서 생성되는 소리만큼 정직하고 건강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머리를 써서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필요 이상으로 높고 몸을 써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폄하했다는 자성으로도 읽힌다.

끝으로는 ‘기록성’이다. 방송은 추운 겨울날 허공으로 내뱉는 입김을 닮았다. 공중(空中/公衆)으로 나와 잠시 머문 후 이내 사라진다. 매일 매일의 호흡이 당연한 것처럼 매일 매일의 방송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쌓이고 쌓여 지층을 만들기보다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마치 호박 보석처럼 소멸하는 것들을 1분짜리 캡슐에 담아 봉인했다. 우리나라 구전 민요 2만여 곡을 9권의 자료집과 103장의 CD로 남겼다. <한국의 굿 기록>이나 <북한 민요 전집>, 중국 만주 일대의 민요도 자료 형태로 보관해 놓았다. 거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한 것이다. 엄두가 안 나는 드넓은 사막에 반 이상의 길을 터준 셈이다.

이 풍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멈춘 그곳을 출발점 삼아 후임자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다보면 사막 횡단이 완성되고 실크로드가 생겨난다. 일회성의 방송에 변형 가능성의 넓은 지평을 열어놓았다.

한 줄을 열 줄로 늘리는 것과 열 줄을 한 줄로 줄이는 것, 그 사이의 반복 속에서 문장의 근력이 강화되듯, 때론 살을 붙이고 또 때론 살을 깎아내면서 제작의 근력을 키워볼 일이다. 스팟으로 나만의 슬로건을 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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