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가진 음악 청년이 가족과 빚어낸 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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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감동과 흡입력 모두 갖춘 휴먼‧음악 다큐

자폐증을 가진 음악청년과 그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자폐증을 가진 음악 청년과 그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PD저널=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클래식 칼럼니스트] 음악과 사람을 황금비율로 섞어서 다큐멘터리를 빚어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열정과 장인정신의 결실로 건강하게 태어난 다큐멘터리는 얼마나 소중할까.

지난달 22일과 27일 일산 메가박스에서 상영된 정관조 감독의 <녹턴>은 휴먼 다큐와 음악 다큐의 경계에 대한 무의미한 논란을 잠재우는 감동과 흡인력을 갖고 있다. 첫 장면에서는 성호가 주인공으로 보인다. 서번트 증후군인 성호는 지하철에서 남의 책을 들여다보는 등 기행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준다.

그가 모차르트 협주곡 C장조를 연주하자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서번트 증후군 진단을 받은 사람들 중 음악 천재가 가끔 나타난다는데, 성호가 바로 그런 케이스 아닐까? 여기까지 보면 이 다큐가 장애를 이긴 천재 음악가와 그를 키운 어머니의 감동 스토리라는 편견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러나 동생 건기가 등장하면서 다큐멘터리는 긴장 넘치는 드라마로 바뀐다. 건기는 취업이 어렵고 어딜 가나 약자인 요즘 젊은이의 전형이다. 그의 힘든 처지와 아픈 마음은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건기는 밖에서 제 앞가림하기도 힘겨운 젊은이다.

그런데 집에서 어머니는 형 성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건기를 잊은 것 같다. 어머니는 건기에게 “너는 아프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고 얘기하며 성호에게만 정성을 쏟는다. 건기가 느끼는 건 단순한 질투와 다르다. 어머니의 ‘과보호’가 형을 오히려 무능하게 만드는 게 아니냐는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건기와 어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장면이 3분 가까이 계속되자 관객들은 바짝 긴장한다.

건기가 어느 날 다쳐서 입원했다. 건기는 다친 상처도 아프지만 마음이 더 아프다. 하지만 성호를 돌봐야 하는 어머니의 책무가 줄어들 리 없다. 어머니의 노력과 희생은 보답 받을 것인가. 건기는 언젠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인가. 다큐는 성호와 어머니, 어머니와 건기, 건기와 성호 사이의 다양한 조합을 만들며 사랑과 갈등, 희망과 좌절의 치열한 대위법을 펼쳐 보인다.

관객들은 세 명에게 골고루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성호가 클라리넷을 연습할 때 성호의 모습 대신 어머니의 표정을 롱테이크로 보여준 샷은 어머니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낸다. 어머니는 쇼팽의 유작인 <녹턴> C#단조를 제일 좋아한다. 자기가 죽으면 그 곡을 연주해 달라고 성호와 건기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러한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간 건기를 카메라가 조용히 따라 나가서 심경을 물어 본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건기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어진다.

세 사람은 역시 가족이다. 러시아 여행에서 건기는 어머니 대신 성호와 함께 가서 훌륭히 매니저 역할을 수행한다. 건기는 어머니가 늘 대신해 주던 면도를 성호가 직접 하도록 가르친다. 이 작은 기적은 해피엔딩을 예고한다. 클로징에서 건기의 웃음을 볼 수 있어서 흐뭇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삶이 되고 결국 내 몸의 일부가 된다. 세 사람은 갈등하고 부대끼지만 결국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음을 발견한다.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여기에 음악의 역할이 있다. 쇼팽의 녹턴과 피아노협주곡을 곳곳에 삽입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등과 화해, 승화와 성숙, 그에 따르는 섬세한 뉘앙스를 언어로 된 내레이션보다 강하게 전달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큐의 메시지를 쇼팽의 음악이 아름답게 말해 주었다.

정관조 감독은 <녹턴>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 넘도록 성호, 건기, 어머니와 함께 했다. 인생 절정기, 특히 다큐 감독 경력에서 10년을 쏟아부었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녹턴>은 성호, 건기, 어머니의 다큐일 뿐 아니라 감독을 포함한 네 사람의 다큐라고 할 수 있다. 정 감독이 세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편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차라리 주관적인 편집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시간 순서대로 편집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감독은 세 주인공과 감독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런 스토리텔링을 이뤄냈다.

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세 사람과 감독의 끊임없는 소통, 그 미묘한 뉘앙스를 쇼팽 음악으로 암시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이었다. 정 감독이 성호 가족을 객관적인 세계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조만간 올 것이다. 세 가족은 물론 정 감독 자신에게도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로 얽혀서 나 자신이 된 사람들,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사람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을지라도, 쇼팽의 음악은 삶의 오솔길에서 이들을 기적처럼 이어줄 것이다.

성호 방과 건기 방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도록 촬영한 화면은 인상적이었다. 손쉽고 작위적인 화면 분할 대신 방 두 개를 한 컷에 담은 대담한 촬영기법은 감독의 뚝심을 느끼게 했다. 삽입된 쇼팽 곡 중 너무 짧다 싶은 게 두어군데 있는 것은 아쉽다.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편집하기 어려웠다면 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맨 뒤의 텔럽 크레딧에서 녹턴 C#단조가 나올 걸로 예상했는데, 일반 관객의 상식을 뛰어넘은 선곡이라 오히려 신선했다.

굳이 한 마디만 덧붙인다.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비장애인인가. 가식 없는 인간이자 소탈한 음악가 성호가 누구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걸 이 다큐는 자연스레 일깨운다. 성호, 건기, 어머니는 쇼팽을 통해 하나가 됐다. 여러 개의 불협화음이 결국 하나의 조화로운 화음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감동이었다. 다큐멘터리 <녹턴>은 “인생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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