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갈등' 보도 그만, 젠더 전문성 키우는 언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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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연구소·전문매체 만든 '서울신문' '한겨레'...논쟁적 보도 벗어나 젠더 의제 적극 발굴
여성혐오 댓글에 '자체 검열' 하기도...젠더 감수성 낮은 조직문화는 걸림돌

조회수 34,000을 넘긴 '슬랩'의 탈코르셋 눕방. 한겨레 젠더 버티컬 매체 '슬랩' 유튜브 화면 갈무리. ⓒPD저널
조회수 34,000을 넘긴 '슬랩'의 탈코르셋 눕방. 한겨레 젠더 버티컬 매체 '슬랩' 유튜브 화면 갈무리. ⓒPD저널

[PD저널=박예람 기자] 언론이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젠더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나 조직을 꾸리면서 젠더 분야의 취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젠더 이슈를 단순히 '남녀 갈등'으로 소비하는 보도 행태에서 벗어나 성평등 사회를 위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펼쳐보겠다는 의미다.

젠더는 최근 몇 년 간 한국사회를 달군 화두였다. 미투(#Metoo) 운동부터 '채용 성차별'과 탈코르셋까지. 여성의 성폭력 및 성차별 고발이 나올 때마다 이에 대한 백래시(backlash, 반발·반격) 현상이 일어나 ‘젠더 갈등’, ‘젠더 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젠더 전문매체 조직은 성차별적인 보도와 젠더 담론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지난 6월 <서울신문> 부설연구소로 문을 연 서울젠더연구소는 젠더 이슈 분석·취재역량 강화를 목표로 세웠다.  서울젠더연구소는 지난 8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공동으로 ‘제1회 서울젠더포럼’을 열고 ‘대림동 경찰관 폭행 영상’으로 촉발된 여경 무용론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다음날 2개면을 털어 포럼에서 오간 내용을 생생하게 전했다.  

 <한겨레>는 지난 14일 20대 여성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젠더 버티컬 매체인 <슬랩>을 론칭했다. ‘여자들의 뉴스룸’이라는 타이틀을 건 <슬랩>은 여성의 목소리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진명선 <슬랩> 팀장은 "매체 준비 과정에서 20대 페미니스트 29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진행한 결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충분하다는 답을 얻었다”며 “젠더 이슈에 관심 없는 남성들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페미니즘을 잘 다루면 대중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슬랩>이 지난 9월 18일 게시한 유튜버 배리나와 정메지가 탈코르셋을 주제로 방송한 ‘탈코 눕방’은 조회수 3만4000건을 넘겼다. 해당 영상의 댓글창엔 “기획 감사합니다”, “보면서 너무 행복해요”라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서울신문' 지난 8월12일자 8면 기사.
서울젠더연구소 포럼 내용을 게재한 '서울신문' 8월12일자 8면 기사.

젠더 전문성을 쌓으려는 이런 시도는 전통적인 미디어의 '젠더 의제 발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슬아 한국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그간 언론은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미투운동처럼 굵직한 사건이 터졌을 때만 젠더 이슈에 관심을 보여왔다”며 “젠더 전담팀이 생김으로써 언론이 선도적으로 젠더 의제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김균미 서울젠더연구소장은 “편집국에서 이미 다루고 있는 ‘핫한’ 젠더이슈보다 덜 주목받더라도 긴 호흡으로 다뤄야할 내용이나 이슈들을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며 “아직까진 편집국과 유기적으로 연계한 취재가 이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추후 청년이나 돌봄과 연계한 다양한 기획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휘발성만 있는 '논쟁'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깊이 있는 기획으로 젠더 문제를 바라보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진단이다. 

의미있는 첫걸음이지만, 외부에서 보내는 여성혐오적인 시선과 함께 언론사 내부의 남성 중심의 문화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한 언론사 뉴미디어팀 PD로 일하고 있는 A씨는 “젠더 콘텐츠에 출연한 취재원을 공격하는 여성혐오적 댓글 때문에 법적 절차를 진행한 적이 있다”며 “이후 젠더 콘텐츠를 만들 땐 ‘출연진을 공격하진 않을까’ 걱정돼 얼굴을 가리고 수위를 낮추는 등 '자체 검열'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적인 댓글을 자주 접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다. 

<슬랩>은 댓글 정책을 마련해 여성혐오 댓글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진명선 팀장은 “콘텐츠를 보는 10대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한 욕설, 차별, 모욕, 비하 댓글은 전부 삭제할 것”이며 “타깃 독자인 20대 여성들의 멘탈 관리에 방해되는 악성 댓글도 모두 신고·삭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젠더 감수성이 낮은 조직 문화도 걸림돌로 꼽힌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국내 언론사 여성기자의 비율은 여성 31.4%으로 남성기자(64.3%)이 절반에도 못미쳤다.  특히 언론사 내부에서 의사를 결정하는 간부들 중에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것도 한몫한다. 

지난해 9월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여성 관련 이슈 보도 관행 및 언론인 의식 조사'에 따르면 여성 간부급의 수가 적을 경우 여성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성별 고정관념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A 씨는 “회사의 부장, 국장급 의사결정권자들은 젠더 이슈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젠더 콘텐츠를 연속적으로 제작하면 ‘너무 젠더에만 쏠린 것 아니냐’는 피드백을 준다”고 말했다. 일선 제작자들이 젠더 이슈를 다룰 필요성을 느껴도 윗선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실제 보도가 나가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진명선 팀장은 “젠더 매체 론칭 과정을 경험하면서 의사결정권자들의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며 “<한겨레> 내부 의사결정권자들이 젠더 불평등과 성차별을 제대로 다루는 게 언론의 시대적 과제가 됐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에 <슬랩>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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