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악플' 인터넷 실명제로 못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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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사망 이후 '인터넷 실명제' 도입 여론 확산..."실효성 없고, 표현의 자유 위축" 우려
"언론의 선정적 보도부터 '여성혐오' 등 근본적 문제 성찰해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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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이미나 기자] 가수 겸 배우로 활동했던 설리(본명 최진리)의 사망 이후 생전 그를 따라다녔던 '악플'을 방지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무분별한 언론의 보도 행태와 혐오표현 문제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악플 방지를 위한 방법으로 인터넷 실명제 부활을 제시한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16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 실명제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69.5%(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p)에 달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호응한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1일 국정감사에서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주장했다. 같은 날 박대출 자유한국당 의원도 인터넷 포털사이트 댓글창의 ID와 IP 주소를 공개하는 소위 '준 실명제'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터넷 실명제, 혹은 '준 실명제'의 실효성에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국내 포털의 경우 휴대폰 인증 등 본인확인절차를 거쳐야만 가입할 수 있는 데다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가입자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만큼, 사실상 지금도 인터넷 실명제에 준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형법상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처벌도 가능하다. 

오히려 이 같은 논의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위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위헌 판결한 근거도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개인정보 자기 결정권·언론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며, (인터넷 실명제) 시행 이후 불법 게시물이 의미 있게 감소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데 있었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이미 강력한 공적 규제가 있는 만큼 규제가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아 악플이 생긴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고, 만약 비슷한 법안이 발의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같은 이유로 위헌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인터넷 실명제 등은) 국가 권력이나 거대 자본권력 등에 대한 내부고발, 성소수자의 의사표현 등 '표현의 자유'를 하는 영역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부작용도 있다"고 말했다.

악플 근절 방안보다 더 기저에 자리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첫 손에 꼽히는 문제는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 행태다. 유명인의 SNS는 쉽게 기삿거리가 됐다. 특히 고인처럼 사회의 규범적 틀을 벗어나려 시도한 인물들에게는 꼬리표처럼 '논란'이 따라붙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은 "사람마다 표현의 방식이나 생각, 가치관이 다를 수 있음에도 언론이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다름'을 선정적인 시각으로 보도했다"며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인터넷 실명제 재도입과 같은 미봉책만 다시 입에 올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언론이 논란을 중계하고 부추겼다는 건 연예·스포츠 매체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설리의 생전 보도들을 모니터한 조선희 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는 "연예·스포츠 매체뿐만 아니라 일간지·경제지·방송사 가운데서도 설리의 신상이나 논란을 집요하게 보도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5월 23일자 MBC 뉴스 화면 갈무리 ⓒ MBC
5월 23일자 MBC 뉴스 화면 갈무리 ⓒ MBC

<서울신문> 온라인판은 지난 4월 17일엔 <만취 라이브 논란 이후 설리 근황 '당당한 노브라'>, 9월 29일엔 <설리, 이번엔 라이브 방송 노브라 논란> 등의 기사를, <세계일보> 온라인판도 5월 22일 <설리, 속옷 미착용하고 당당하게 거리 활보>, 9월 29일 <SNS서 '노브라→가슴 노출' 설리, 누리꾼 "개인자유" VS "과도하다"> 등의 기사를 게재했다.

또 지난 5월 23일 MBC는 <설리, 26살 차 선배에 '성민 씨' 호칭 논란>에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26살 나이 차나 경력을 생각했을 때 '씨'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쏟아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희 활동가는 "이 같은 보도 가운데에는 '성적 대상화'의 책임이 피해 당사자에게 있다는 관점을 내포한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악플만 선정해 (언론이) 소개했다는 것은 언론이 (설리의 행동에 대해) 이미 가치판단을 갖고 보도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며 "한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장사를 한 그간의 언론 행태를 ‘인권’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의 장삿속을 추동하고, 악플의 '판'을 깐 포털 사이트 등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박선숙 바른미래당 의원은 최근 악플을 비롯한 혐오표현을 사업자가 사전에 차단토록 한다는 내용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적 개념으로서의 '불법정보'에 혐오표현을 추가하고, 이것이 인터넷 상에 유통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취지다.

박 의원은 21일 국정감사에서도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 운영사, 인터넷 매체 등은 악플로 가장 수익을 거두지만, 이들의 부당이득에 대해선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며 방송통신위원회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송경재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연구교수는 "그동안 포털 사이트 등이 나름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사후 처방에 그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금칙어 설정이나 AI 기술을 이용한 필터링, 댓글 신고 기능 활성화 등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포털 사업자들을 비롯한 관계 기관·단체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협의체 등을 통해 자율규제를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경재 교수는 "더 무서운 게 '사회에 의한 사회의 감시'"라며 "장기적으로는 백서를 만들어 사회적 분위기를 환기하는 등 자율규제의 영역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선숙 의원실 관계자도 "이번 법안 발의가 향후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적 기준 및 언론과 포털 등에 대한 자율규제 방안에 대한 논의로까지 발전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를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악플이나 언론의 선정적 보도 행태, 연예산업 전반 등의 이면에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소비해 온 여성혐오가 자리한다는 의미다.

대중문화 전문매체 <아이즈>는 지난 2016년 출간한 책 <여성혐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지금 설리는 하나의 리트머스처럼 작용하는 존재다. 설리의 행동과 그에 대한 반응들은 지금 한국이 여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 민망할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수반되지 않고선 뾰족한 대책이 나오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는 생전 설리를 향했던 악플과 선정적 보도에 대해 "젊은 여성 일반이 당하기 쉬운 여성혐오와 언어폭력이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라며 "혐오발언을 해도 사회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만연한 환경 자체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어 황 평론가는 "지금은 온오프라인 상에서 누가 누구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차별을 가할 수 있는지와 같은 '권력의 역학관계'를 살필 때"라며 "권력의 헤게모니가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악플이나 선정적 보도만 문제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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