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담는 카메라의 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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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21] '무정한 빛'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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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시사고발 프로그램 연출을 하다보면 항상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 피해자에게 닥친 비극을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비극을 암시하듯 재현하면 시청자들은 그 비극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기 쉽다. 반대로 적나라하게 제시된 비극은 시청자들을 위한 자극적인 유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고통을 드러내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내는 게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일을 오래했다고 해서 그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경계가 모호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느 때에는 그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하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비극의 자극적인 면 너머의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데 실패하기도 했다. 반복적인 실패의 경험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로부터 도망치게 만들기도 했다. 

수지 린필드의 <무정한 빛>은 그 규칙들을 정하는 데 나름의 도움을 얻은 책이었다. 그는 폭력으로 일그러진 인체를 담고 있는 사진에 대한 기존의 비평들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재난, 비극, 정치폭력을 여과 없이 사진에 담는 행위와 그 사진을 보는 행위가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고통에 둔감해지게 만들고, 관음증을 부추긴다고 보았다. 그렇게 희생자들의 고통은 '포르노그라피'로서 소비된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이는 비평가들이 사진에 과도한 의미와 임무를 떠넘기며 발생한 오류다. 비평가들이 정치가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사진가에게 해내라고 요구하고,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진들을 '무기력'하다고 비판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평가들은 사진이 자본주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진이 애초에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사진에 대한 비평가들의 혐오는 ‘시대착오’적이다.

1920년대, 사진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그 어떤 이미지보다 현실과 닮았고, 쉽게 복제가 가능했으며, 누구든 어느 정도의 기술만 익히면 생산할 수 있었다. 발터벤야민은 그 기술이 혁명적 요구에 부합할 가능성과 함께, 새로운 자본의 지배 도구로서 복무할 수 있다는 위험을 명민하게 파악했다. 저자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가 변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진이 품은 위험성에 대해서도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학자인 수지 린필드가 쓴 '무정한 빛'
언론학자인 수지 린필드가 쓴 '무정한 빛'

저자는 사진이 사건의 전체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비평가들과 갈리는 지점은 사진과 진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대하는 태도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비평가들은 진실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과 실천과 이상을 폐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재현 없이도 사건을 전달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의 결과이거나, 재현되는 사건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의 표현이라 본다. 그 역시 사진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수많은 오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하고 적절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사진이 어째서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는 것일까. 저자는 사진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평가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듯, 관객들이 사진을 보며 사진가의 의도에 완전하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떨어져서 사진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저자에게 그 '오해'가 가능한 영역이 바로 사진의 관객들에게 ‘윤리’를 요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과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안다. 이 우연한 연결을 만들어주는 끈은 재현 이미지를 생산하는 자들의 윤리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니 저자가 보기에 비극을 끝장내기 위한 세상의 변화는 관객들이 사진을 읽는 윤리적 태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관객의 윤리는 무엇인가. 그는 사진을 보는 행위가, 그 사진이 왜 여기에 있으며 그 사진 속의 인물이 왜 우리와 함께 공통된 미래를 꿈꾸고 있지 못한지를 따져보고, 그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표하기보다, 그 고통을 만들어 낸 자가 누구인지,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 피해자를 위한 연대라고 말이다.

사진가는 고통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보여주기를, 관객은 그 고통을 가능한 한 피하지 않기를 그는 요구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상과 명분이 희미해지고 인과관계가 복잡한 정치폭력의 경계 속에서, 사진은 한 발 떨어져 그 지층을 더듬을 수 있게 한다. 예전에 비해 더 낙관하기 힘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이미지들을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사진가의 윤리라면, 그 이미지의 두께를 파악하는 게 관객의 윤리다. 그래야만 사진의 소비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재현된 이미지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 다루는 사진보다 더욱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영상 이미지를 둘러싼 윤리의 영역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종종 탈-진실의 세계로 이끄는 이 위험한 재현 이미지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그리고 관객들이 어떻게 TV 앞에서 윤리적인 ‘보기’를 시도할 수 있게 유인할 것인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라즐로 네메즈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한 가지 실마리를 더 제공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무정한 빛>에서도 언급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증언하는 몇 안 되는 사진들을 다룬다. 급박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사진처럼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증언한다. 이 영화엔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이 없다. 관객은 오로지 좁은 화면의 비율 속에서, 흐릿한 초점 너머로만 비극을 마주할 수 있다. 그 화면의 절반은 심지어 사람의 등으로 가려진다.

영화관에 온 관객들은 이 좁은 화면을 통해 비극을 마주하고자 결단을 내린다. 고통을 다루는 영상을 만드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윤리의 자리는 이것이다. 여기가 내가 걸어가야 할 좁은 길의 입구라는 것 말고는 내가 더 보탤 수 있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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