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향하는 어부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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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어부의 마음처럼
‘다큐멘터리 3일’ 촬영하다 만난 어부의 한마디..."바다가 나를 받아줄까요"  
  • 이은미 KBS PD
  • 승인 2019.12.16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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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지난해 5월 소장품 특별전 '함께, 보다'를 통해 공개한 전혁림 작가의 ‘통영항’(사진 제공 청와대) ⓒ뉴시스
청와대가 지난해 5월 소장품 특별전 '함께, 보다'를 통해 공개한 전혁림 작가의 ‘통영항’(사진 제공 청와대) ⓒ뉴시스

[PD저널=이은미 KBS PD] 아, 올해도 놓쳤다. 모니터로만 봐왔던 전혁림 화백의 작품 ‘통영항’은 스페인의 항구 같으면서도 다리나 주변의 산을 보면 영락없는 한국의 풍경이라 독특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올해 1월부터 ‘전혁림 미술관’을 가보려고 통영 여행을 계획했건만, 결국은 가족들의 취향 때문에 미술관 관람 대신 낚시 체험을 했다.

그 뒤로도 전혁림 화가의 작품을 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매년 10월 통영에서 열리는 전혁림 예술제도 제작 스케줄과 겹치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 한번 보겠다는 꿈은 점차 욕망이 되고, 집착이 됐다. 

 비록 올해 전혁림 화백의 바다 그림은 보지 못했지만, 실제 바다는 그 어느 때 보다 실컷 봤다. 17년 동안 시사교양프로그램 연출을 하면서 PD들은 한번쯤은 제작하는 농어촌 프로그램도 못 해봤다. 개인적으로도 전원생활보다는 ‘도시’라는 인간의 발명품에 호기심이 있어 프로그램 배경은 대부분이 도시였다. 그런데 올해 <다큐멘터리 3일> 제작을 하면서 하반기에만 두 번이나 연달아 바다 마을로 촬영을 간 것이다. 
 
 바다는 정열적이었다. 노령화와 낙후된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오산이었다. 어촌은 변하고 있었다. 72시간 동안 머물렀던, 지도에서도 한참 찾아야 하는 무창포 항구 마을과 100여명이 사는 남포 갯벌 마을에서는 3040세대의 모습이 촬영 내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아예 귀어‧귀촌을 한 사람부터 부모 일손을 도우러 주말마다 내려오는 자녀까지 어촌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시의 경쟁이 싫어 어촌으로 왔다는 그들도 도시만큼이나 전투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 조선소가 폐업을 하면서, 직장을 잃고 바다로 온 40세 선장의 고민은 꽤 인상 깊었다. “바다가 나를 받아줄까”라고 출항하면서 매일 고민한다던 앳된 얼굴의 선장이었다. 다들 물고기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좋은 장소를 선점하려고 경쟁을 하거나 낚시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시겠다고 홍보하는 바닷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너무 태평스러워 보였다. 어촌의 생활도 도시 못지않게 치열한데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나 걱정이 됐다. 그의 수동적인 태도가 답답하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고 방송사으로 돌아와서도 젊은 어부의 그 말 한마디는 나로 하여금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편집하면 시청자는 받아들여줄까’, ‘이렇게 접근하면 이 사람은 섭외에 응해줄까.’ 하나하나를 결정하기 전에 예전보다 자꾸 망설이게 되었다. 

 PD는 만드는 프로그램마다 메시지를 담고,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을 담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며 십 수 년이 넘는 시간을 현장에서 뛰었다. ‘PD는 시청자보다 반 발짝 앞서야 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제작자가 들어봤을 것이다. 트렌드를 이끌고, 아젠다를 던지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안고 뛰어든 직업의 세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시청자는 받아들여줄까?’라는 수동적인 모습이라니,...
 
 이렇게 PD가 자꾸 움츠러들어도 될까 걱정이 들 때, 한 선배가 한참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감히 뭔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냐는 말이었다.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했다. 선배에게 ‘프로그램에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시각을 담는 노하우가 뭐냐’며 몇 번이나 쫓아다니며 물어봤건만, ‘비디오보다 오디오에 집중하라’는 말만 들었다.

그 때는 선배가 쩨쩨하게 노하우 전수를 안 해준다고 생각했었다. 젊은 선장의 말을 곱씹고 이제야 조금 이해를 한다. PD는 뭘 말하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PD는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는 욕망보다는,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포착해야 하는 게 요즘 PD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전혁림 화백의 바다 그림은 처음 볼 때는 이국적인 색감과 입체파 같은 첫인상에 끌렸다. 이제는 그림 자체보다는 ‘바다가 나를 받아줄까’라는 말과 선장의 표정이 더 연상된다. 올해는 아무래도 전혁림 화백의 작품을 직접 보려던 바람은 물 건너 간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꼭 그 그림을 봐야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전시를 찾아다니기 보다는, ‘그 그림이 나를 받아줄까’ 하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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