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없는 토론과 중계식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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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없는 토론과 중계식 보도 
[비필독도서 23] ‘개념’ 없는 사회를 위한 강의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0.01.06 1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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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방송된 JTBC '언론개혁' 신년토론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1일 방송된 JTBC '언론개혁' 신년토론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오학준 SBS PD]  새해 첫 날부터 신년토론 방송으로 SNS가 후끈 달아올랐다. 한때는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내는 모습은 한편의 정치드라마와 같았기에, 사람들은 편을 나누어 자신의 검투사가 적을 무릎 꿇리는 모습을 중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싸우는 건 정치의 본질이다. 대화하기 이전에 소리를 치고, 피켓을 들고,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부터가 정치다.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시민의 권리는 모두 이런 치열한 싸움의 결실이었다.

문제는 싸움의 목표와 방법이다.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는 가장 마지막엔 대화의 과정을 거친다. 유일하게 허용되는 무기이며, 우리는 그 말을 통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 불완전한 결론을 내리고, 과감한 행동을 해내야 한다.

토론이 정치 공동체에서 이런 결정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으려면 몇 가지의 전제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람들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서로는 평등하게 말할 권리가 있으며, 동시에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결정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서로는 같은 말을 다른 의미로 쓰지 않아야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토론은 어떤 의미일까. 거기에 어떤 방법과 목표가 있을까. 토론이라는 공간에 등장해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거나,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장황하게 쏟아내는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참칭하고, 혐오와 증오의 언어를 내뱉으며 사람들을 세력 싸움의 재료로 만들어버릴 때, 토론은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민주주의 종말의 시금석이 되어버린 것일까.

오래 전 읽었던 박이대승의 <‘개념’ 없는 사회를 위한 강의>를 떠올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정치와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고들고, ‘개념’ 없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의 정치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가 구분한 언어 사용법(개념 언어/정치 언어)는 같이 고민해볼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박이대승의 저서 ‘개념’ 없는 사회를 위한 강의.
박이대승의 저서 ‘개념’ 없는 사회를 위한 강의.

그는 언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가능한 한 유동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언어 사용 방법을 ‘정치 언어’, 반대로 그 관계를 고정해 비교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자 하는 언어 사용 방법을 ‘개념 언어’로 부른다. 모든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정치 언어가 되기도 하고 개념 언어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정치 언어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가 보기에 정치 언어는 ‘거짓말’ 이상의 무엇이다. 정치의 공간에서 언어가 사용되는 보편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정치란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묶어내고, 최대한 선명한 적대의 선을 그어내는 데에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려면 이들을 한데 묶을 언어는 그 자체로 가장 무의미해야만 한다. 그래야지 사람들은 각자 다른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그 언어에 묶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 청년, 경제민주화, 탄핵과 같은 언어들은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동시에 정치 언어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소수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폭로할 수 있는 우회 수단이기도 하다. 만연한 계급 불평등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들의 욕망과 어떻게든 괴로운 처지를 드러내고 싶은 이들의 시도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가난한 청년’과 같은 언어다. 불평등 일반은 해소되지 않지만, 청년은 ‘예외’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니 이는 은폐인 동시에 저항이며, 세력균형의 표현인 셈이다.

물론 이런 정치 언어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기에, 실질적으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책이나 법, 제도는 개념 언어들로 구성된다. 정당은 정치 언어로 집권하지만, 동시에 실체가 있는 법과 제도로 그 정치 언어에 담긴 구체적인 열망을 번역해내야 한다. 그러니 정당과 공동체의 성패는 정치 언어가 얼마나 잘 개념 언어로 매개되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저녁이 없는 삶은 주 40시간 노동으로 번역되어야 하고, 차별 없는 사회는 차별금지법으로 번역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정당에게 거는 공동체 구성원의 기대다.

문제는 정당이 정치 언어와 개념 언어를 조율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그리하여 최소한의 합리적인 대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촛불’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정책 결정 과정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은 내가 들었던 촛불의 의미가 아니다’라고 말하게 만들었다. 정당은 구체적 정책과 슬로건 사이의 거리를 해명해야 했다. 무엇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경제민주화인지 설명해야 했다.

정치 언어와 개념 언어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질수록 정치 언어는 더욱 무의미해진다. 민주주의를 논하는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 바탕에는 합리적인 소통이 놓여 있고, 이 합리성의 토대는 정치 언어가 무한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족쇄이자 고삐가 된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정당과 정부는 이 고삐를 단단히 거머쥐어야만 한다. 그런데 한국은 이 고삐를 누가 쥐고 있는가.

모든 곳에서 정치 언어가 넘쳐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애초에 우리가 참조해야 할 합리적인 토대, 개념 체계가 제대로 사회에 뿌리박혀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고삐가 어디 매어져 있는지 관심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스스로 표준이 되기를 거부하고, 무책임한 범죄 집단처럼 집권만 하면 된다는 이들이 정치를 지배했고, 모든 언어는 무의미해졌다. 한쪽에는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쓸데없는 말싸움이 있고, 다른 한쪽엔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밀실 정치가 있었다.

지금 한국의 토론은 이 쓸데없는 말싸움을 담당하는 듯하다.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엔 규칙이 없고, 언론의 중계는 ‘싸움이 진절머리 난다’는 반정치적 태도들로 도배된다. 엄밀해야 할 이들이 엄밀하지 못하면, 모든 곳에서 모든 말이 말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냉소적 믿음만 확고한 지반을 차지하게 된다.

신년 벽두부터 언론이 ‘개념 체계’를 세우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묻기보다, 싸움 잘하는 사람들을 불러 ‘토론’이란 이름을 붙이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보는 건 괜찮을까. 

대화의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펜대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마지막 남은 약간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만 할까. 듣고 싶은 것을 찾아 듣고, 듣기 싫은 것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에서 일하는 이들은 무엇이 자신들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새해에도 고민을 껴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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