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사연에 담긴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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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사연에 담긴 삶의 무게 
MBC '여성시대'에 도착한 어마어마한 청취자들의 편지
얕은 경험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각양각색 사연들
  • 하정민 MBC PD
  • 승인 2020.01.31 16: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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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된 MBC 표준FM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유튜브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29일 보이는 라디오로 진행된 MBC 표준FM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유튜브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하정민 MBC PD] 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최근 새삼 알게 된 이야기가 놀라웠다. 우리 눈과 뇌는 종일 이미지를 보정하느라 바쁘다는 거다. 눈알 속 시신경이 매번 보이면 사물을 파악하는 게 곤란하니 시신경이 보이지 않게 보정하고, 눈알의 떨림도 보정하고, 그 외에도 눈의 구조상 시각을 방해하는 것들을 거둬내느라 뇌는 내내 바쁘다는 거다.

심지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고 믿는 모든 사물은 사실 0.1초 전의 이미지라고 한다. 뇌까지 전달되고 또 보정 과정을 거치느라 시차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말도 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도 의심해봐야 한다는 걸까. 늘 자의적으로 보정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겸손만이 살 길이란 소박한 생각도 든다.

이미지의 최전선에 있는 건 화가들일 거다. 보정돼 보이는 세상 너머, 세상의 본질을 그리려 노력했던 이들이다. 가볍게 얘기하면 자기 뇌와 싸운 사람들이다. 뇌는 자기가 기억하는 사물들의 정보를 이미 잔뜩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제대로 된 상을 만들고 색도 수시로 조정한다. 이걸 피해 사물 본연의 색을 찾기 위해 노력한 화가가 인상파의 간판스타, 클로드 모네다.

제조술의 발달로 튜브 물감이 발달한 덕에 모네는 야외에서 관찰한 이미지를 바로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었고, 그렇게 자연광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데 평생을 썼다. 빛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인생을 걸고 연구했다. 그래서 같은 풍경을 여러 차례 다시 그린 연작에 도전했고, 특히 수련이나 건초더미 시리즈 등이 유명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루앙 성당 시리즈다.

루앙 성당은 섬세한 흰 색의 조각들이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모네는 아예 성당 앞에 숙소를 잡고 매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을 관찰해 여려 편의 그림을 남겼다. 흰색의 건축물이 빛의 변화에 따라 다른 빛깔을 낼 때, 모네의 뇌는 계속해서 ‘저 건물은 흰색이야!’라 주장하며 관찰을 방해했을 거다. 그걸 피해가며 모네는 성당을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그건 단순한 모사로서의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인식의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하는 수도승의 태도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빛 말고도 우리가 자꾸 ‘보정’해서 바라보는 건 많다. 편견 탓에 어떤 사람이나 그 사람의 삶을 제멋대로 단정 짓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이런 무심함을 넘어서려고 노력한 화가도 있다. 물랭루주의 화가로 유명한 툴루즈 로트렉이다. 그는 당시 스타들의 포스터를 그리면서 유명해졌는데, 그들을 그저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고 고유한 특징을 잡아내 강조하는 방식을 채택해 화제가 됐다.

당시 인기가수였던 이베트 길베르는 그에게 자신을 제발 그렇게 ‘추하게’ 그리지 말아 달라는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로트렉에게 포스터를 의뢰한 적은 없지만, 로트렉이 강조해 그렸던 그녀의 가는 팔과 까만 장갑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로트렉은 요즘으로 치면 훌륭한 이미지 메이커였던 셈이다. 그건 인기 스타들을 뻔한 매력으로 그리지 않은 그의 세심한 관찰 덕분이었을 거다.

스타들뿐 아니라 그는 사창가의 여성들도 그렸다. 몽마르트 유곽의 여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제작한 석판화 연작 ‘여인들 (Elles)’이 발표됐을 당시엔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그런’ 그림이 아니라 반응이 영 떨떠름했던 모양이다. 화집 통째로는 잘 팔리지 않아서 낱장으로 팔았을 정도였다고도 한다. 로트렉은 그들의 짐작과는 다른, 일상 속 현실의 모습을 담담한 톤으로 그려냈다. 편견 없는 태도와 관찰력이 고스란히 담긴 그 석판화들은 무척 개별적인 순간이 담겨있고 그렇기에 도리어 보편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해주셔도 되나 싶게 내밀한 편지들이 많이 도착하는 프로그램을 맡다보니, 사연을 대하는 태도도 자꾸 점검하게 된다. ‘삶의 무게 앞에 당당한 사람들’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프로그램 <여성시대>. 대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그렇듯 그 힘은 청취자들로부터, 또 그들이 전해주는 사연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그 사연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골라내고, 또 어떻게 진열해 방송으로 전달할 것인가가 PD에게 가장 큰 과제다.

처음엔 <여성시대> 앞으로 도착한 편지의 어마어마한 양에 압도돼 허둥지둥, 일단은 다 읽어내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읽기에 숙달이 좀 됐다 싶었을 무렵부턴 사연별로 유형을 나누며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삶의 무게’는 각양각색이고, 그걸 풀어내는 방식도 다양했다. 청취자의 편지는 감히 내가 분류하거나 잔머리를 굴려 ‘보정’해가며 다룰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어르신들은 어르신용 콘텐츠만 좋아할 것 같지만 오산이다. 유명 배우, 가수에게 그 어떤 젊은이보다 진한 감성의 팬레터를 보내오신다. 트렌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언가에 열광하는 마음은 사춘기 청소년 못지않다.

시댁, 소위 ‘시월드’를 한탄하는 사연에는 한숨만 있지 않다. 당신 아들 별로라며, 전국에 소문내달라는 당차고 귀여운 며느리도 있다(양희은 선배님이 아주 시원하게 호통을 쳐주셨다). 사연에는 놀랍게도 한 명 한 명의 우주가 담겨있다. 그걸 으레 하는 관습으로 읽으면 다 놓쳐버리고 밋밋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만 쥐게 된다. 

요즘은 매일 다양한 편지 사연들의 의외성에 감동하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방송으로 잘 전달할지, 회의 중에도 그런 얘기를 자주 나눈다. 이런 삶의 디테일을 더 찾아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게 삶의 무게가 제아무리 벅차도, ‘영차영차’ 당당히 살아내는 우리들에 대한 예의이고,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뭐든 얕은 경험과 감에 의지해 자꾸 ‘보정’하려는 편견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게 라디오를 끄면 잊힐 허망한 노력이라도 괜찮다. 우리는 매일 생방송으로 그러고 있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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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영 2020-02-06 20:53:04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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