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해고' 다투다 숨진 청주방송 PD...유족 "억울함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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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해고' 다투다 숨진 청주방송 PD...유족 "억울함 풀겠다"
14년 동안 비정규직 PD로 일하다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故 이재학 PD, 법원은 사측 손 들어줘
유족 "청주방송의 진정한 사과 원해"...청주방송 사장 "안타깝지만 사건 내용 잘 몰라"
  • 이미나 기자
  • 승인 2020.02.06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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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재학 PD의 빈소 ⓒ PD저널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재학 PD의 빈소 ⓒ PD저널

[PD저널=이미나 기자] "남들처럼 살라고 할 걸, 왜 옳게 살라고, 신념을 지키라고 말해서…."

세상을 떠난 동생을 떠올리던 누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동생은 CJB 청주방송에서 십수년 간 일하다 해고당한 故 이재학 PD다. 올해 서른여덟인 이 PD는 지난 4일 '억울하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청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일 오후,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국방송스태프협회, 한국방송영상제작사협회 등이 보낸 근조 화환이 빈소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고인이 14년 동안 일했던 청주방송 근조화환은 보이지 않았다.  

2004년 CJB에서 조연출·연출 등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한 업무를 비롯해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는 사업 관련 업무까지 담당해 왔던 이 PD는 지난 2018년 자신과 함께 일하는 스태프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가 '연출자 교체'라는 명목으로 업무에서 배제됐다.

'부당해고'라고 판단한 이재학 PD는 그해 9월 청주방송을 상대로 자신의 근로자 지위를 확인해줄 것과 해고 시점부터 복직 시점까지의 임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고, 지난 1년 6개월 간 법적 다툼을 이어 왔다.

당시 청주방송 직원들은 이 PD의 승소를 예상했다고 한다. 생전 이재학 PD 자신도 종종 '선례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더 좋은 업무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포기 않고 싸울 것'이라는 말로 의지를 내보였다. 최근 판례의 동향을 봐도 계약서상의 내용보다는 실질적으로 어떤 작업을 수행했는지, 상시적으로 노동의 감독을 받았는지 등이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데 주요한 요소다.

이 PD는 수시로 담당 국장에게 자신의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등 정규직 PD와 다름없는 업무를 수행했다. 업무 수행 능력도 뛰어났지만 자신과 함께 일하는 스태프를 통솔하고 챙기는 모습이 남달랐고, '선례를 남기겠다'는 그의 말 역시 후배들을 위해 '총대를 맸다'는 의미였다는 게 청주방송 전·현직 직원들의 공통된 평가다.

과거 청주방송에서 일했다는 그의 지인은 "(처음 봤을 때) 그냥 청주방송 PD였다. 누가 (프리랜서라고) 말하기 전까진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또 다른 청주방송 관계자는 "현장을 잘 지휘할 줄 아는 타고난 PD였다"고 말했다. 이 PD의 유족 역시 "가족모임을 마다하고 일을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1월 1심 판결은 예상과 달랐다. 청주지방법원 민사6단독(판사 정선오)은 이재학 PD가 오랫동안 조연출로 청주방송의 일을 해온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특정 시간 및 장소에 출퇴근할 의무가 없었고, 회사가 그의 근태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며 청주방송의 손을 들어 줬다. 당초 이 PD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줄 만한 청주방송 관계자 3명에게 진술서를 받아 제출했지만, 법원은 그들이 법정에 출석해 증언하지 않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이재학 PD와 그를 대리했던 이용우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는 항소했다. 재판부가 노동법과 방송 산업에 관한 이해 없이 회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빈소에서 만난 이용우 변호사는 "근로자성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았는가, 종속성이 있었는가의 여부"라며 "방송사에서 조연출은 (회사의) 업무지시를 받고 종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연출'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건 재판부의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다.

5일 청주의료원에 차려진 이재학 PD의 빈소 ⓒ PD저널
청주의료원에 차려진 이재학 PD의 빈소 ⓒ PD저널

이재학 PD는 유서에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적었다. 그의 뜻을 이어받아, 이재학 PD의 가족은 재판을 이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이재학 PD의 동생은 "우리가 바라는 건 위로금 같은 것이 아니라 형이 청주방송의 PD였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 그리고 청주방송의 진정한 사과"라며 "형의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사건이) 잊히도록 둔다면, 형에게 면목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청주방송 안팎에선 이재학 PD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이 PD를 비롯한 비정규직 스태프의 처우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PD연합회는 6일 성명을 내고 "살릴 수 있는 젊은 목숨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지역민방, 거의 모든 방송사가 비슷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방송 생태계를 위해 이제라도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장원석 전국언론노동조합 청주방송지부장은 통화에서 "그동안 꾸준히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며 "약자의 그늘을 함께 걷어내자는 노동조합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내부 논의 이후 곧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후 8시 넘어 빈소를 찾은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안타깝다. 고인은 끝까지 일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청주방송의 무성의한 대처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셈이 됐다"며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져야할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장례를 치른 이후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고 말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희망연대 방송스태프지부,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미디어 관련단체들도 이재학 PD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구성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날 오후 이성덕 청주방송 사장을 비롯한 청주방송 임직원들은 빈소를 찾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10여분 간 조문했다. 빈소를 떠나며 이성덕 사장은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1심 결과에 대해선 "각자의 주장이 있어 변호사들끼리 다퉜고, 판결이 그렇게 났기 때문에 (우리는) 수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3월 취임해 당시 상황을 잘 모른다고 밝힌 이 사장은 유족이 항소심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굳이 여기서 더 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사건) 내용을 잘 모른다. (대응을) 논의해 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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