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줄에 배우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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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줄에 배우는 노래
[뽕짝이 내게로 온날 46]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 승인 2020.03.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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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나이를 먹을수록 악기 하나라도 가까이하면서 늙어가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엔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부잣집 딸에게나 주어진 매우 호사스러운 교육 환경이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본 적도 없었고 플롯, 클라리넷은 읍내 유일 관악대가 있는 농고 브라스밴드가 보유하고 있었는데 연주자들은 전주로 레슨을 다닌다고 했다. 

남원읍에서 그나마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방과 후 교육이라면 주산학원을 들 수가 있겠다. 나 역시 학원비 때문에 피아노는 엄두도 못 내고 주산학원에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재능이 미치지 못한 탓인지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원장의 진한 향수 냄새만 맡고 집에 오곤 했다. 실력이 크게 늘지 않고 재미도 없어서 주산학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두게 되었다. 가족들에게는 이로써 상업계 진학은 어렵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피곤한 눈으로 등교하면
수업은 왜 그렇게 많이 있는지
든든한 아침을 먹고온지
몇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뱃속이 허전해 지는걸까
가끔은 무거운 눈을 참기가 힘들어
나도 몰래 꿈속으로 가
무서운 선생님의 꾸중으로 힘든 하루 보냈지
(중략) 
너무나 많은걸 배우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시험은 왜 그렇게 많이 보는지
특별히 잘못한게 없는데도
왜 그리 선배들 앞으로 지나갈때면
항상 겁이 났을까
흘리던 땀을 식혀주던 
책받침엔 예쁜 배우들이 웃지만 
밤새워 끝낸 숙제들은 모두 어디 가버린걸까
(이현석 노래 / <학창시절>)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먼 친척뻘 되는 이모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바이엘 상권도 마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도 모자랐고 무엇보다 재능, 열정 이런 게 부족했던 것 같다. 친척에게 작은 답례 형식보다 정당한 레슨비가 지급되었다면 열정이 고개를 들 수 있었을까.

몸과 마음이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문화교육의 혜택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악기 하나라도 제대로 배웠다면 장년 이후의 삶이 얼마나 윤택할까, 늘 아쉽다.

부모가 되어 어린 시절 예술 교육에 대한 갈증과 약간의 허영심을 더해 두 아들에게 문화적 소양을 쌓게 해주고 싶었으나 이번에는 아들은 크게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두 아이 중 누구라도 좀 더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면 (그 덕에 나도 좀 배워볼 요량으로) 집안에 피아노를 들일 마음의 준비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들은 음악적 재능과 소양이 없는 것 같고 그 후로 우리 집에 악기와 인연이 없었다.

오늘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지금의 내모습 다시 그려 봤으면
그대는 언젠가 다가올
내 모습에 가끔씩 설레이던 마음
하지만 어린 날들을 떠나 올수록
내 꿈은 멀어만 가고 
수없이 다가서던 힘겨운 날들과 
끝이 없는 내 방황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고
(김장훈 노래 / <어린 시절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책방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예기치 않은 암수술로 학원에 등록한 지 한 달 만에 그만두게 됐다. 오른쪽 팔의 림프를 일부 떼어내서 오른팔을 쓰는 일이 어렵게 된 것이다.

팔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흥미롭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무엇인지, 피아노를 전공한 사촌동생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사촌동생이 “언니는 목소리가 좋으니까 악기 말고 성악을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라고 말해 내심 놀랐다. 이 나이에 성악을? 의문이 들었지만 오래전 후배와 선배에게 비슷한 권유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무엇보다 2~3년 전, 전주 국제영화제 축하공연에서 접하게 된 가곡 '진달래'의 신선한 충격과 진한 감동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이상규 시 정애련 곡 소프라노 김민지씨가 노래한 '진달래'는 참신하고 세련되었으며 절절한 가사에 호소력이 뛰어났다.

그 자리에서 만난 정애련 작곡가의 겸손하고 따뜻한 심성이 더해져 가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에 불을 지폈다. 언젠가는 '진달래'를 제대로 불러서 널리 알리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가끔 연락을 하는 정애련 작곡가는 크게 환영하며 격려해주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먼 산 진달래 필 때면
텅 빈 가슴 설움만 남아
이별의 아픔 곱게 물들어 갑니다

악몽같은 그리움이
삶을 할퀴고 짓밞아 오면
우뢰쳐 불러보는 그대 이름
나는 목이 쉬었습니다.

어느때나 어디서나 
꽃잎같이 피어나던 당신의 모습
굳어진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환상처럼 번져납니다
 아! 꿈으로 일렁이는
진달래향기
가슴 가득 품은 채 
눈 감아 봅니다.

꿈으로 일렁이는 진달래향기
(이상규 시 / 정애련 곡 / <진달래>)

마침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8주 과정 겨울학기가 개설되어 성악 클래스 야간 과정에 등록했다. 입문이라도 해보자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1대 1로 딱 30분간 진행되는 수업은 처음 접해보는 방식이어서 많이 긴장했다. 지도교수는 짧은 시간에도 프로답게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지도해줬다.

내가 아는 가곡은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가 전부다.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에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던 한국 대표 가곡, ‘선구자’ ‘보리밭’ ‘명태’ 등의 노래와 엄정행 백남옥 교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음악선생님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크게 내라고 했다. 배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게 뭔지, 그 시절 알기나 했겠는가. 지도는 하나하나 새롭고 신기하다.

악기도 사람의 손길에 따라 최대한 장점을 살려 소리를 내듯이, 사람의 몸도 올바른 자세와 훈련으로 성악 발성에 최적화된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50대 중반이면 모든 것이 쇠퇴하고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하는 나이인데 이 나이에도 계발될 수 있는 인체의 기능이 남아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됐다. 내 머리 어딘가에 공간이 남아있고 그 공간을 통해 소리가 증폭되기도 하고 더 예쁘고 곱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8주의 수업기간에 ‘진달래’, ‘고향의 노래’, ‘남촌’을 조금씩 불러보았다. 교수님의 지도로 감정과 정서를 더해서 부르다 보니, 한국 가곡이 얼마나 아름답고 서정적인지 크게 감동했다.

국화꽃 저버린 겨울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 서리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한적한 빈들에서 보라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골 초가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김재호 작사 / 이수인 작곡 / <고향의 노래>)

혼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노래를 만나기 전까지 수동적인 관객의 입장이다가, 내 안의 모든 것을 끌어다가 밖으로 쏟아놓는 과정은 또 다른 창작의 일부이다. 좋은 시와 운율을 종합예술로 완성시켜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작사가와 작곡가의 예술혼이 녹아있는 좋은 노래에 누가 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다 보면, 그야말로 ‘마음으로’ 부르게 된다. 지도교수는 “학창시절, 성악을 전공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 같다”거나 “좀 더 일찍 노래를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조언으로 한껏 고무시켜준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악을 전공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내가 노래에 조금이나마 소양이 있었더라도, 작은 읍내에서 피아노 학원도 다니지 못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성악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으되, 지금이라도 평생교육의 현장에서 작은 혜택을 누리며 공부길을 알았으니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꾸준히 호흡과 발성을 하다 보면 목소리도 좋아지고 얼굴도 밝아질 것이어서 방송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 가곡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희미한 기억 하나를 끌어올렸다. 2005년 전북시인협회‧전북여류문학회가 전북작곡가협회와 함께 20곡의 가곡을 만들어 발표를 했었다. <2005 온고을 소곡>에 졸시 ‘강의 노래’가 수록되었는데,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발견하고 부끄러우면서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외로움의 강
물소리도 잦아드는 적막속에서
깊은 고독에 젖어 있을 때
그대 한줄기 바람이 되어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지
산들바람 살랑 
그대 고요한 미소에
나뭇가지 손 흔들어 화답하고
잠자던 젊음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네.
내 영혼에 숨결을 불어넣은 그대
그대와 더불어 생명을 노래하네

나는 그리움의 강
추억도 저물어가는 쓸쓸한 강가
아득한 슬픔에 목놓아 울고 있을 때
그대 한 점 수묵화로 남아
나의 눈물을 담아주었네
깊은 그리움 붉은 날 되어 
벅찬 가슴 환희 핀 꽃
희망의 용틀임 시작했네
내 화폭에 숨결을 불어넣은 그대
그대와 함께 삶을 그려가리 
(김사은 시 / 전낙표 곡/ <강의 노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밝아질 것이다. 노래의 힘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게다가 가장 정직하고 ‘나’ 다운 ‘목소리’라는 악기를 새롭게 알게 되어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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