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발견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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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발견한 장소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03.10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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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대교에서 바라본 도심. 2016.05.16. ⓒ뉴시스
서울 한남대교에서 바라본 도심. 2016.05.16. ⓒ뉴시스

[PD저널= 박재철 CBS PD] 음악은 ‘시간예술’이라고 한다. 음악이 왜 ‘시간’과 연관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회화나 건축같이 공간을 점유하는 예술이 아니니 그렇게 정의되나 싶었다. 다음의 문장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 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 중에서

음악은 흐르는 시간에 멈춤 버튼을 누른다. 그래서 순간을 향유하고, 기억하고, 돋을새김한다. 음악이 시간예술이라는 건, 시간의 어느 마디에 단단한 테두리를 둘러 사진 마냥 잡아놓고 감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데, 공간의 축에는 음악의 자리가 없는 걸까? 생각해보면 어떤 곳의 분위기가 음악으로 탄생하기도 하고, 어떤 음악은 나만의 특별한 장소로 슬그머니 데려다 놓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음악은 시간예술인 동시에 공간예술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의 가지가 이리저리 뻗어 나가다 음악을 공간의 관점에서 풀어보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지 궁금해졌다.

비주얼적인 장소를 오디오적인 소재인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다큐멘터리. 하지만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것과 그걸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여서 막상 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이럴 때 욕망을 실현해주는 것은 늘 협업하는 이의 조력이다.

서울의 지명을 풍수지리 살피듯 발품을 팔고 다니던 선배가 있었고, 음악에 숨어 있는 당대의 사회, 문화, 풍속 등을 밀도 있게 풀어낼 줄 아는 구성작가가 있었다. 그 둘의 에너지에 한 숟가락만 더 얹으면 고봉밥이 될 듯했다. 되돌아보니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음악으로 장소의 지도를 그리며, 장소와 음악을 동시에 재발견할 수 있겠다는 희망, 그 바람으로 제작한 다큐가 4부작 <사운드 맵- 음악으로 그린 서울 지도>다.   

서울의 중심, 한강을 가운데 놓고 갈라진 강남과 강북, 거기서 흘러나온 노래들이 우리의 첫 번째 콘텐츠였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 윤수일의 ‘아파트’,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등에는 강남 개발이 관통하고 있었다. 한남대교와 경북고속도로가 준공되고 배추밭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급변하면서, 강남역과 신사동을 중심으로 유흥업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노래들이 앞다투어 만들어졌다. 

청계천을 사이에 둔 북촌의 종로와 남촌의 명동도 음악적 인큐베이터로서 오랫동안 기능하고 있었다. 명동은 1970년대 트렌드를 선도한 음악 감상실, 라이브 살롱과 카페, 고고클럽 등이 가득했던 유행 1번지였다. 반면, 종로는 학생이나 재수생들이 모여 있는 학생들의 거리였고, 외래 문물의 유입처인 YMCA와 사대문 안의 교회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명동에서 화려한 브라스가 등장하는 밴드와 그룹사운드 음악이 사랑받았다면, 종로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포크 음악의 메카였기에 이장희와 트윈폴리오, 양희은의 노래가 수많은 청년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상파 방송사가 몰려 있던 여의도가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을 통해 히트곡을 양산했다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방송을 타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이 만들어지고 향유되던 곳은 신촌이었다. <들국화>나 <신촌 블루스>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이태원과 홍대, 대학로와 동대문 등 장소가 잉태한 음악들은 그야말로 차고 넘쳤다. 다큐를 제작하면서 음악이 시간예술이면서도 동시에 공간의 예술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주옥같은 음악들, 그리고 그런 음악들이 있었기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장소는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음악은 오른손으로 ‘시간’을 선물하면서 왼손으로는 우리들에게 ‘공간’을 건넸다. 이 다큐는 그간 쥐지 않았던 음악의 왼손을 잡아보았다. 공간예술로 살펴본 이 음악 다큐는 이런 나의 생각을 담아 적으며 마무리했다.
 
“사람이 떠나도 장소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습니다. 켜켜이 쌓인 사람들의 온기가 장소에 특별한 열기를 선사합니다. 어떤 노래들은 장소의 그 열기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눈물과 애환, 열정과 환희,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고 있는 인구 천만 삶의 터전 서울! 그 한가운데에서부터 끝 가장자리까지, 장소의 열기를 간직한 노래들로 들으며 걸었던, 나흘간의 음악 여행을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사람은 장소를 ‘발명’하지만 노래는 장소를 ‘발견’합니다. 두 귀를 타고 흐르는 우리 시대의 노래들이 ‘발견’한 그때 그곳은 어떤 장소들이었을까. 어떤 사연들을 꼭꼭 숨기고 있는 곳이었을까. 귀를 기울여 그곳을 다시 찾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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