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편 철마다 겪는 만남과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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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 철마다 겪는 만남과 이별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03.28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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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두 쌍의 부부는 부엌 테이블에 둘러앉아 진을 마시고 있다. 싱크대 뒤쪽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부엌을 가득 채운다. 술잔이 차고 비워지는 사이 어쩌다가 주제는 사랑으로 옮아간다.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이 오가다 술이 떨어지면서 이야기는 멈춘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에 관한 단막극이다. 사랑! 그렇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각자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다의적인 만큼 사랑은 모호하다. 짙은 모호함 속에서도 사랑이란 단어의 사용 빈도는 높다.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의 사랑 이야기에 ‘그건 사랑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을 긋거나,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연신 말한다. 뜻과 의미도 모른 채 규정하고 범용한다. 역설적이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의견들이 교차하는 와중에 외과의사인 멜이 경험담 하나를 꺼낸다. 교통사고로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 노부부가 구사일생으로 회복 단계에 이른다. 아내의 회복세와는 다르게 남편의 상태는 악화되기만 한다. 멜은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된다.

“둘 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깁스와 붕대를 하고 있었어. 작은 눈구멍과 콧구멍, 입 구멍만 있었지. 노인은 그녀를 눈구멍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했어. 그게 자기를 상심하게 한다고 했지. 그는 머리를 돌려 자기 마누라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던 거야”

노부부의 곰살맞은 애정묘사인가 싶어 읽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작가는 이 삽화에 사랑의 본질적인 속성을 슬쩍 끼워 넣은 듯싶다. 내 시야에 항상 자리했던 누군가가 사라졌을 때, 그 부재의 크기가 고스란히 존재의 크기라는 사실 말이다.

그 누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의 실체는 포착 불가능하다. 다만 상실의 순간에 사랑은 상실 너머로 자신의 실루엣을 잠시 드러낼 뿐이다. 이삿짐이 나간 텅 빈 방, 선명히 남는 가구의 흔적이 그동안 몰랐던 가구의 위치와 크기를 한순간에 각인시켜주는 것처럼. 사랑은 이별과 상실 속에서만 그 속성을 잠시 느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빛이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감을 알려주듯이.

이 소설을 이렇듯 자의적으로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봄 개편 때문이었다.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번 있는 방송사 개편으로 프로그램은 없어지거나 새로 생겨난다. 라디오는 짧게 6개월, 길게는 20년이 넘는 프로그램들이 적잖다. 동고동락, 희로애락이 프로그램에 얽히고설켜 있기 마련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폐지를 통보하는 역할을 맡다 보니 심사가 복잡했다. 연애 시절, 작별의 말을 꺼낼 때처럼 단어를 고르고 시기를 저울질하길 수차례건만 조심스럽고 어렵게 꺼낸 말이 원망과 불만을 누그러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안다. 제작진과 진행자의 저항과 적의의 이면에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존심에 대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좋은 팀워크를 유지하고픈 마음도, 직업인 생활인으로서의 고충도 있을 테다.

“방송이 원래 그런 게 아닌가? 다반사인 일인데 이렇게까지...”하던 나만의 서운한 감정 속에서 문득 알게 된다.

“사랑을 했구나...”

매일 바라봤던 대상을 더 이상 눈에 담지 못했을 때 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하던 소설 속 삽화의 주인공처럼, 프로그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사랑했던 대상을 잃고 이별통을 겪고 있는 것이구나.

좋은 이별, 덜 아픈 상실이 있을까? 이별은 매번 힘든 일이다. 이별의 자리에는 굳은살이 박이지 않으니까. 고통과 상처를 최소화할 방법들을 찾아본들 언제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다만, 힘든 만큼 그 대상에게 향했던 내 사랑의 크기를 가늠해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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