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훼마을에서 목격한 한줄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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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마을에서 목격한 한줄기 희망 
조지 프레드릭 왓츠 '희망'을 떠올린 화훼마을의 모습
  • 이은미 KBS PD
  • 승인 2020.03.30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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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그래도 꽃은 핀다, 김해 대동 화훼마을 72시간'편 화면 갈무리.
지난 27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그래도 꽃은 핀다, 김해 대동 화훼마을 72시간'편 화면 갈무리.

[PD저널=이은미 KBS PD] 첫인상이 청승맞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그림이 하나 있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실제 이 그림을 봤을 때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바로 조지 프레드릭 왓츠의 <희망>이라는 그림이다. 그림 속의 눈 먼 여인이 맨발로 지구처럼 생긴 구(球) 위에 앉아 줄 하나만 겨우 남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처량하고 처연해, 첫인상이 영 우울한 게 아니었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미술관에서 본 이 작품은 작은 크기에 미술관의 모서리 쪽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아 그 그림 앞에 서서 관람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 역시 유명인이 말한 그림이니 한 번 더 눈에 담아두자는 마음으로 봤을 뿐이다. 

그랬던 그림이 최근 KBS <다큐멘터리 3일> 촬영차 방문한 대동화훼마을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자꾸 생각이 난다. 처음 마을에 갔을 때는 1년 동안 지은 꽃 농사가 코로나19 여파 때문에 팔리지 않아 마을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며 농민들이 촬영을 꺼렸다. 실제로 한쪽에서는 꽃밭을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었다. 농협 공판장에서는 두세 차례 유찰된 꽃들을 커다란 가위로 잘라 폐기처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나마 각 가정에서 한 송이씩이라도 사주면 애써 가꾼 꽃들을 폐기하지 않아도 되니 위로가 될 거란 마을 대표 어르신의 말에 농가를 설득해 3박 4일의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마을 분위기가 우울한데 카메라에 뭘 담을 있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지켜본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일손을 거들 인력도 없고, 가족끼리 일을 해봤자 인건비도 건지기 힘든 상황인데. 터놓고 말하면 올해 농사는 회복 불가능의 상태인데도 농민들은 매일 밭에 나왔다. 72시간 동안 본 농민들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음에 키울 모종에 대해 얘기하고, 새 비닐 온실을 짓는다며 배수공사까지 직접 했다.

'희망 Hope'(1886, 런던 테이트 미술관)
'희망 Hope'(1886, 런던 테이트 미술관)

적자면 멈춰야지 왜 내년을 준비한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는데, 촬영을 마칠 무렵에 한 어머니가 인터뷰 중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 있나. 뭐하고 해야지. 한 해 한 해 이렇게 속으며 농사짓고 산다, 허허허.’

그 말에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차피 대유행이 된 코로나19이고, 실컷 탕진이나 해보자는 마음에 그동안 사고 싶어 장바구니에 넣어 놓은 온라인 쇼핑몰의 옷이며 그릇들을 마구 질렀는데,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그분들은 다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꽃이 희망이고 미래라는 추상적이고 뻔한 말들이 가슴에 꽂히는 순간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온 힘을 다해 끌어 올리는 것이 희망이 아닐까. 포기하고 싶은 본능과 분위기가 세상을 지배할 때, 역행하는 에너지가 바로 희망이 아닐까. 

김해 대동화훼마을을 담은 이번 <다큐멘터리 3일>을 제작하면서 많은 제작진들이 울었다. 막내작가가 울고, 촬영 감독이 울고, 내레이션을 한 배우가 울었다. 우리가 울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슬픈 상황에서 밝게 웃는 농가의 모습 때문이었다.

오늘도 한고비 넘었다 싶으면 확진자가 크게 늘고, 시급한 문제를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진다. 봄이 왔음에도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괴롭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인내해 본다. 아, 이런 그림을 찾아낸 오바마 전 대통령의 안목도 인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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