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가해’ 벗어나 ‘피해자 중심’ 보도 고민하는 언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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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성착취 영상 거래 사건'으로 범죄 성격 규정한 MBC
KBS, '한겨레' 이어 '추적단 불꽃'과 '디지털 성범죄' 연속 기획 보도
"피해자 위해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답 찾아가야"

KBS는 대학생 기자단 '추적단 불꽃'과 2일부터 연속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KBS는 대학생 기자단 '추적단 불꽃'과 2일부터 연속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PD저널=박상연 기자] 텔레그램 성착취방 운영자 조주빈에 주목한 언론이 성범죄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이 거센 가운데 일부 언론사를 중심으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조주빈의 과거와 입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해 사건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현장에서 '피해자 중심' 보도의 선례를 남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MBC는 지난달 24일부터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명을 ‘집단 성 착취 거래 사건’으로 규정했다. “돈을 주고 가입한 공간에서 성착취 행위를 직접 주문하거나 그렇게 생산한 가학적인 영상물을 다시 사고팔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YTN <뉴스가 있는 저녁’>도 다음날 ‘집단 성 착취 영상 거래 사건’으로 해당 범죄를 명명하며 “단순 n번방으로 부른다면 사건의 잔혹성과 심각성을 제대로 알릴 수 없다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장호 MBC 보도국장은 “‘n번방’이란 이름 자체는 사건 실체를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고, ’집단‘ ’성착취‘ ’거래‘ 등 사안의 본질을 포함한 단어를 고민했다”며 “’조재범 쇼트트랙 전 코치 성폭행 사건‘ 때도 가해자와 범죄 본질을 중심으로 사건을 명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이번에도 취재기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3월 24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 화면 갈무리
3월 24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 화면 갈무리

지난해부터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벌어진 성착취 범죄에 관심을 보였던 <한겨레>는 내부 논의를 거쳐 보도의 원칙과 방향을 세웠다. 

임지선 <한겨레> 젠더데스크는 “범죄 자체가 워낙 잔혹해 이 범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취재기자와 24시팀장, 데스크 에디터들과 함께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내용까지 보도할지’ 등을 계속 이야기해왔다”며 “성착취 범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범죄를 왜 지금까지 처벌하지 못했는지 등을 명확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실명 공개도 내부 찬반 토론을 거쳐 결정했다.  실명 공개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가해자가 범죄 사실을 시인했으며, 유사 범죄를 예방한다는 점에서 보도의 공익 가치가 크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임지선 젠더데스크는 “(이름 공개 여부) 토론이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한겨레>가 지켜온 신상 공개 원칙이 있고 이번 사례가 보도 기준을 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KBS 사회부 사건팀은 이번 사안을 집중 취재하면서 ‘경도되지 않을 것’과 ‘피해자 중심 보도’라는 기준을 정했다. 이유민 KBS 기자는 “‘단독’에 얽매이거나 보도를 선정적‧자극적으로 하지 말자는 점과 가해자 개인보다 피해자를 중심에 두고 2차 가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공감대를 확인하고, 기준을 따라 보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유민 기자는 “현장에서 취재하다 보면 알고 있던 원칙도 잊을 때가 있는데, 캡과 바이스가 수시로 언론노조에서 발표한 ‘n번방 보도‘ 관련 긴급지침 등을 메신저 등에 공유하고 독려한다”고 말했다. 

내부적으로 공유한 보도 기준은 실제 보도에서도 드러난다. KBS <뉴스9>는 지난달 25과 28일 각각 <“네 잘못이 아니야”… ‘지지동반자’ 찾으세요>, <“지금 중요한 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연대와 지지가 중요>리포트를 통해 피해 구제와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 방법 등을 다뤘다. 리포트 마지막에는 피해자가 상담과 지원받을 수 있는 상담소 연락처도 기재했다.

KBS는 2일 텔레그램 'n번방'을 처음으로 신고한 대학생 기자단 '추적단 불꽃'과 함께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연속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추적단 불꽃'은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성범죄 보도 준칙'을 지키고 있는 KBS에만 취재 협조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KBS는 이날 <[KBS X 불꽃 ⓛ] "상위 '성착취방' 들어가려 수험생방에 링크 뿌렸다">를 공개하면서 "'n번방', '박사방' 등 성착취 영상 촬영을 강요당했거나 이 과정에서 금전적 사기나 신상정보 유출 등 피해를 당한 사례 등 성범죄 피해 제보를 받는다"고 했다. 

최이숙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많은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가 생존자로 살아가도록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그에 답하는 언론 보도가 필요하다”며 “피해자 관점에서 범죄를 구조적‧맥락적으로 해석하고, 피해자가 사회적인 위로를 느낄 수 있는 보도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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