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호소 외면한 언론, ‘디지털 성범죄’ 방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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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국민일보 외에 다수 언론 조주빈 검거 전까지 무관심...'추적단 불꽃'·분노한 시민들이 공론화 이끌어
"시민 감수성 쫓아가지 못하는 언론, 부끄러움 느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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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적단 불꽃' 유튜브
ⓒ '추적단 불꽃' 유튜브

[PD저널=김윤정 기자] 미성년자가 포함된 여성들의 성 착취 영상을 제작, 유포해온 일당의 검거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다크웹, 텔레그램 등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에 숨어 불법 행위를 즐기고 묵인한 이들은 현재 경찰이 파악한 숫자만 약 6만 명에 달한다. 해외 서버에 숨어 ‘절대 잡힐 일 없다’며 자신하던 이들을 끄집어낸 이들은 수사 기관도, 기성 언론도 아닌 두 명의 대학생들(추적단 불꽃)이었다.

평소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두 언론인 지망생은 뉴스통신진흥회 탐사보도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관련 취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공모전 우수작으로 뽑힌  ‘미성년자 음란물 파나요?’는 두달여간 ‘n번방’에 잠입 취재한 결과물이다. 

이후 기성 언론 중에서는 처음으로 <한겨레>가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라는 제목의 연속 보도를 내놨지만 언론계 전반으로 확대되진 않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 ‘빅 카인즈’에 등록된 주요 54개 언론사 중 지난 12월까지 해당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는 <한겨레>가 유일했다.

이를 취재한 김완·오연서 <한겨레> 기자는 최근 자사와 진행한 대담에서 “<한겨레>만 보도하니 오히려 대화방 유입이 늘었다. 이들은 <한겨레> 보고 왔다면서 박사방을 찾으러 다녔다”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커서 힘들었다. 우리 보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한숨이 나왔다”며 당시의 허탈함과 무력감을 소회했다. 

김완 기자는 “20대 여성들이 국회 입법 청원을 올리고 여성 독자층이 많은 작은 매체들이 끊임없이 언급한 것이 이 문제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됐다”면서 “지난해 기준으로 트위터에서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단어가 'n번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목소리를 높인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익명의 여성들로 꾸려진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단체 ‘리셋(ReSET)'이다. 트위터를 통해 ’n번방‘, ’박사방‘ 등 성 착취 대화방 유입을 유도하는 계정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때,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이 모여 '리셋'을 만들었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분노한 시민들은 조주빈이 검거된 뒤에도 성범죄 근절에 힘을 보태고 있다. 

시민들은 조주빈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 링크를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고,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공영방송사로서 이런 사건을 메인 꼭지로 상세하게 보도해달라”는 청원에도 9만 명이 넘는 시민이 동의했다. BBC, CNN 등 외신에 제보하자며 언론사 이메일 주소와 영어로 쓰인 사건 개요글을 공유하는 움직임도 SNS에서 보인다. '추적단 불꽃'은 "사건을 자극적으로만 다른 뉴스가 2차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면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겠다며 유튜브 계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텔레그램 내에서 발생한 성 착취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해달라는 KBS 시청자청원에 9만 명이 넘는 시민이 동의했다.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 갈무리.
텔레그램 내에서 발생한 성 착취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해달라는 KBS 시청자청원에 9만 명이 넘는 시민이 동의했다.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 갈무리.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언론은 지난달 초반 <국민일보> ‘n번방 추적기’ 보도가 나오고 경찰 수사에 진척을 보이면서 뒤늦게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에 뛰어들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무감했던 언론의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뒤따른다. 

강기석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지난달 29일 자신의 SNS에 “(추적단 불꽃의) 기사는 완벽한 특종이었으되 특종기사가 누려 마땅한 사회적 파급력은 너무 지체됐고, 그 책임은 다시 한 번 나 포함, 기존 언론이 져야한다”라고 적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이번 사건의 공론화 과정에 대해 “과거부터 이러한 이슈에 대해 제대로 짚어주지 않는 언론, 정치권, 사법계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쌓여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범죄 수법은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는데 언론만 여전히 신창원 잡던 시대에서 한 발도 나아지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기성 언론의 경직된 구조와 시민들 피부에 와닿는 밑바닥 이슈보다 거대 담론이나 정치적 이슈에만 집중하는 언론의 특성, 시민 저널리즘이 발굴한 이슈를 우습게 여기는 권위적인 의식 등이 종합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기성 언론보다 먼저 이슈를 발굴해 낸 시민 저널리스트, 언론보다 먼저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은 시민들의 움직임을 보며 기성 언론인들은 부끄러움과 위기를 느껴야 한다. 제대로 반성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기성 언론의 존재 가치는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검찰로 송치된 가운데 경찰서 앞에서 조주빈 및 텔레그램 성착취자의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검찰로 송치된 가운데 경찰서 앞에서 조주빈 및 텔레그램 성착취자의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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