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대처하는 PD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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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대처하는 PD의 자세 
갑작스러운 출연자 하차 이후 이어진 '밤샘작업'
가장 괴로운 것은 지쳐가는 스태프를 보는 것...OK에 한마디에 담긴 책임감은
  • 허항 MBC PD
  • 승인 2020.05.1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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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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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허항 MBC PD]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다. 한 출연자가 과거 논란에 휩싸이면서 갑자기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은 생각보다 괴로운 시간으로 이어졌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자극적인 헤드라인들과 악플들은 제대로 읽을 겨를도 없었다.  당장 구멍 난 방송 분량을 채우기 위해 회의실과 편집실은 밤샘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매주 월요일 11시,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분량의 방송은 어김없이 내야했기 때문이다. 

체력적으로도 버거운 일이었지만 정신적인 에너지가 빠르게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PD 후배들과 작가들, 스태프가 벅찬 스케줄에 지쳐가는 표정을 보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이 와중에 문득, ‘다른 PD들은 이런 힘든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 궁금증을 곱씹다보니, ‘PD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라는 물음까지 이어지게 됐다. 나름 10년이 넘은 PD 생활인데도,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찾아보니 제법 많은 ‘PD론’, 혹은 ‘감독론’을 논한 책들이 있었다. 몇 권의 책들을 지푸라기라도 잡듯 잡아 읽다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12명의 성난 사람들>,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걸작들을 만든 거장 시드니 루멧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점들을 솔직히 담은 ‘감독론’이다.

초반부터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나는 한 번도 이 영화(12명의 성난 사람들)가 ‘시드니 루멧 감독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프린트’라고 말하는 사람일 뿐이다”. 필름 영화 시대였던 당시, ‘프린트’란 지금의 ‘오케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감독이란 OK 컷을 결정하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거장의 지나친 겸양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시드니 루멧 감독은, 영화란 것은 감독이 직접 제어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거듭 강조한다. 날씨, 예산, 함께하는 사람들의 재능, 심지어 출연 배우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도 영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모여 이루어진 장면에 대해 ‘OK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만이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의 괴로움에 매몰되어 돌아보지 못했던 곁을 둘러본다. 프로그램 회의실과 촬영장, 편집실, 협력부서들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하던 일들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었다고 해서, 시청률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래서 잠시 좌절했다 해서 이 배에서 내린 사람은 없다. 나보다 훨씬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 언제나처럼 각자의 몫을 하고 있다.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그렇게 해낸 ‘몫’들이 모여 다음주에 방영될 우리 프로그램의 형태가 갖춰질 것이다. 그렇게 차려진 밥상에 나는 최종적으로 OK를 외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OK’를 외치는 일뿐일지도 모르겠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말에서 또 다른 통찰을 엿본다. 감독이 제대로 OK를 외치기 위해서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외침이 얼마나 큰 책임감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시드니 루멧 같은 거장 감독에게나 나 같은 평범한 예능 PD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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