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시절 '보도지침' 원본 첫 공개..."검찰 발표만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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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 '보도지침' 원본 첫 공개..."검찰 발표만 보도"
민언련, 1986년 보도지침 폭로한 '말'지 원고 원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
당시 자료 넘긴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오늘 계기로 언론인들 사실보도·공정보도 힘썼으면"
  • 이미나 기자
  • 승인 2020.06.08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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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공개된 '보도지침' 사료 ⓒ PD저널
8일 오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공개된 '보도지침' 사료 ⓒ PD저널

[PD저널=이미나 기자] 

▲ 부천서 성고문사건 보도지침

①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②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 (크기는 재량에 맡김)

③ 검찰발표 전문은 꼭 실어줄 것.

④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⑤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⑥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은 불가

⑦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여성단체 등의 사건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1986년 7월 16일, 부천경찰서 소속 경찰이 학생운동가를 성폭행한 이른바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발표를 앞두고 언론에 내려온 '보도지침'의 내용이다.

언론은 이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당시 발간되던 조·석간 6개 신문은 다음날 사회면 톱기사로 검찰이 밝힌 조사결과만을 충실하게 보도했고, 제목엔 '성폭행' 대신 '성(적) 모욕'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문화공보부 아래 홍보정책실을 두고 거의 매일 각 언론에 특정 사건에 대한 보도가 가능한지 여부부터, 보도 방향과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보도지침을 내렸다.

정권의 부도덕성과 함께 언론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보도지침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가 발행하던 월간 <말>지의 1986년 9월 특집호 <보도지침, 권력과 원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바로가기)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듬해 6·10 민주항쟁의 불씨가 됐다.

6·10 민주항쟁 33주년을 앞두고 이 보도지침 원본이 공개됐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은 8일 오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의 보도지침 자료 584건 등이 담긴 <말> 특집호 원고 원본을 기증했다.

이 원고는 1988년 당시 <말> 상무이사였던 임상택 전 민언련 사무총장·부이사장이 보안을 위해 지금까지 별도로 보관해 왔고, 지난해 민언련에 기증한 것이다.

8일 기증식에는 <말>에 보도지침 자료를 제공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를 비롯해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보도지침 폭로 보도에 참여한 신홍범 전 민언협 실행위원(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도 참석했다.

8일 오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보도지침' 원본 사료 기증식이 열렸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네 번째가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 PD저널
8일 오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보도지침' 원본 사료 기증식이 열렸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네 번째가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 PD저널

공교롭게도 기증식이 열린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의 전신은 그들이 보도지침 폭로 이후 끌려와 조사를 받았던 대공분실이다. 이들은 1987년 초 국가보안법 위반과 국가모독죄 등의 이유로 구속 기소됐다가, 9년 후인 1995년 12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보도지침 폭로 이후) 주변을 볼 수 없도록 옷이 뒤집어씌워진 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 40여 일간 조사받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 자리에서 잠도 못 자고 얻어맞기도 하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런 장소에서 (기증식을 여니) 다시 한 번 과거를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김주언 전 기자는 "내가 보도지침을 공개했던 건 그것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 상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당시 편집기자로서 언론이 정권의 홍보도구로서만 역할을 한다는 자괴감이 컸다"라며 "보도지침은 유신정권부터 알게 모르게 존재하다 전두환 정권 들어 제도화됐는데, 지키지 않으면 기자들이 남산 중앙정보부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 고문당하거나 언론사가 폐간 압박을 받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언론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가는 오늘날, 보도지침 원본 공개가 갖는 의미도 각별하다. 당시 정권의 반민주성을 고발한 보도지침 사건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일으켰음은 물론, 불의에 순응하며 정권의 조력자 노릇을 했던 기성 언론 종사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다.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은 "언론은 언론인 자신의 양심과 양식,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원칙"이라며 "이를 벗어난 어떠한 압력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도지침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이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요즘에도 여전히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일부 언론은 '사내 내부지침'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떠한 종류의 보도지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기자들이)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기자 역시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새로운 형태의 언론 통제 상황에서 등장한 '기레기'라는 표현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우리 언론이 진실 추구와 공정보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며 "오늘 보도지침 원본 기증을 계기로 현장에 있는 언론인들이 공정하게 사실보도를 위한 노력에 힘써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공개된 보도지침 원본 사료는 향후 정리 작업을 거쳐 올해 안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바로가기)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임상택 전 월간 말 상무가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보도지침 원본 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증식'에 참석해 기증자 기증 발언을 하고 있는 앞으로 보도지침 사본이 놓여져 있다. ⓒ뉴시스
임상택 전 월간 말 상무가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보도지침 원본 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증식'에 참석해 기증자 기증 발언을 하고 있는 앞으로 보도지침 사본이 놓여져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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