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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0 15:24
  • 수정 2020.06.15 09:26

'N포 세대' 장보고, 오토바이 탄 해적…KBS 라디오 드라마 맞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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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와이파이 한국인' 김호상 KBS PD "'와이파이 시리즈' B급 정서 유지하되 풍자 더 할 것"
"라디오 드라마 제작, 공영방송 KBS의 역할이기도...듣는 콘텐츠, 앞으로 역할 커질 것"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 녹음 현장 모습 ⓒ KBS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 녹음 현장 모습 ⓒ KBS

[PD저널=이미나 기자] "할배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궁복을 추적하기 위해 출동한 해적 일당! 어허허, 근데 봐봐, 오토바이 헬멧 미착용. 이게 몇 명이야, 벌금 2만 냥! 한 놈 두 놈 세 놈…! 그들의 불법 질주를 막아서는 궁복."

KBS 1라디오에서 평일 오전 11시 40분부터 약 14분 간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의 한 구절이다. 본명이 궁복이었던 '해상왕' 장보고가 젊은 날 당나라로 건너갔으며 당시 신라인을 상대로 한 당나라 해적의 약탈 행위가 빈번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어쩌면 장보고가 해적에게 쫓겨 당나라로 몸을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더했다.

여기에 해적이 오늘날 '강한 남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특정 브랜드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설정이나, 그 와중에 '헬멧을 착용하지 않으면 2만 원의 범칙금을 문다'는 도로교통법을 떠올리게 하는 해설자의 대사는 역사적 서사에 현대 문물을 녹여내 듣는 재미를 더한다.

<와이파이 한국인>의 김호상 KBS PD는 <와이파이 초한지> <와이파이 삼국지> 등 '듣는 드라마'를 전문으로 만들고 있다. <와이파이> 시리즈는 풍자와 인터넷 밈 등 각종 유머코드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에 녹여낸 게 공통적인 특징이다. 해적이 언급되자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등장한다거나, '알파고'를 떠올리게 하는 '아재고'가 시시때때로 이야기에 끼어들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식이다. 

<와이파이> 시리즈를 뜯어보면 다양한 설정과 디테일이 녹아 있다. 등장하는 노래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김호상 PD는 "음악이 배우가 되어 대사를 하는 셈"이라고 했다. 2014년 발표된 국카스텐의 '변신'부터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의 삽입곡으로 쓰인 윤시내의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까지 베리에이션도 상당하다. 14분 남짓한 길이의 스낵 콘텐츠로서, 듣는 이들의 귀를 잡아끌어 재미를 줄 수 있는 '훅'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의 김호상 PD ⓒ PD저널
김호상 KBS PD ⓒ PD저널

다만 소설 기반의 전작들과 달리, 익히 알려진 위인들의 일대기를 다루는 <와이파이 한국인>은 함부로 원전을 바꾸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제 아이가 <와이파이> 시리즈의 애청자에요. 위인을 다루는 새로운 시리즈를 한다고 하니 '역사적 사실이 있는 걸 어떻게 막 만들려고 해?' 하더라고요. 정확한 지적이죠. 또 장보고처럼 역사에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처럼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도 있고요. 그래서 (이야기의) 뼈대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 갖고 가되, 그 안에 <와이파이> 시리즈의 공통된 정서였던 'B급 유머나 '현실 정서와의 결합'을 강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 말처럼 신분제의 벽에 부딪혔던 장보고를 N포 세대에 비유하고, 백제인 출신의 신라인이 차별받았던 당대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지역주의와 같은 현실 속 문제를 떠올리게도 한다. <와이파이 한국인>이 단순히 웃음을 버무려 위인의 삶을 전하는 라디오 드라마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김호상 PD는 "시원하게 깔 수 있는 현실 속 문제들은 까려고 한다"며 "<와이파이 삼국지>에서 공명이 여성으로 설정됐던 것도 능력에 상관없이 성별 때문에 차별을 받는 건 자명한 사회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했다면, 공명이 여성이 아니라는 법은 없었지 않았겠나"라고 했다.

한때 라디오 드라마가 각 방송사마다 활발히 제작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미디어의 중심이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옮겨가면서 라디오 드라마도 하나둘 사라졌다. 

그럼에도 2013년부터 꾸준히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어 온 김호상 PD는 "오늘날의 주류 미디어와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목소리와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 드라마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와이파이 한국인>에 한국의 현대 문물과 정서를 부각하는 또 다른 이유 역시 KBS 한민족방송을 통해 <와이파이 한국인>을 듣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김 PD는 "그 분들이 '한국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것들을 좀 더 느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이건 공영방송인 KBS의 역할이기도 해요. 더빙과 성우가 사라지는 시대라고도 하는데, 공영방송으로서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지키는 건 필요한 일이죠. 영국이나 독일의 공영방송이 꾸준히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더빙은 촌스럽다'는 이야기는 이런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봐요."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 녹음 현장 모습 ⓒ KBS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 녹음 현장 모습 ⓒ KBS

그런 점에서 최근 팟캐스트나 오디오북 등 이른바 '듣는 콘텐츠'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이제 '브로드캐스팅'이라는 개념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KBS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라디오를 듣는 시대였어요. 한 번에 문자가 몇 천 건씩 왔고요. 지금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콘텐츠가 있는데, 과연 라디오까지 들으려 할까요? 하지만 '오디오 콘텐츠'만 떼어 놓고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요. 오디오 콘텐츠의 장점은 듣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 스스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 다른 것을 하면서도 즐길 수 있다는 데 있죠. 지금의 자극적인 콘텐츠 안에서 오디오 콘텐츠가 일종의 '숨 쉴 수 있는' 콘텐츠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호상 PD는 라디오 드라마 외에도 한 분야의 덕후가 8시간 동안 자신이 애정을 쏟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8 hours of everything>, 20대의 문턱에 다다른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인터랙티브 고민 상담 콘텐츠인 <스무고개> 등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네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봤어'라는 심정에 가까운 시도들이었다.

"하나의 킬러 콘텐츠를 만들 게 아니라 철저한 기획 아래 200개의 콘텐츠가 나와야 해요. 영화 <미니언즈> 속 미니언 부대 같다고 해야 할까요. 농담 삼아 '스튜디오 와이파이'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곤 하는데, 바로 이런 개념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의 커다란 우주 안에서 여러 개의 소우주들을 만드는 거죠. 그동안 다양한 제작 경험을 쌓았고, 인프라를 갖춘 KBS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끝을 정해두지 않았다"는 <와이파이 한국인> 제작이 한창이지만, 김호상 PD는 또 다른 '듣는 콘텐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들어보라며 휴대폰을 내밀자 BBC가 재해석한 오디오 드라마 버전 소설 <제인 에어>가 재생됐다. 음향 효과부터 성우들의 연기가 담긴 <제인 에어>는 생동감이 넘쳤다.

"가끔 오디오북을 녹음했다는 성우 분들께서 '10시간 동안 책만 읽다 왔다'고 말해요. 그렇게 낭독만 하는 게 과연 듣는 사람들에게 재밌을까요? 완전히 드라마 같지는 않지만 또 그저 읽는 것만은 아닌, 듣는 이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그런 오디오북 콘텐츠를 올해 안에 시도해 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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