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보이’, 미카엘 혹은 로레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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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보이’, 미카엘 혹은 로레의 그해 여름 
  • 신지혜 시네마토커(CBS<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 승인 2020.06.24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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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2일 개봉한 영화 '톰보이' 스틸컷.
지난 5월 14일 개봉한 영화 '톰보이' 스틸컷.

[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아이는 여러 번 이사를 다닌 듯하다. 이번에 이사 온 집은 어떨까 기대와 불안이 겹치는 표정으로 아이는 집으로 들어선다. 마르고 단단한 몸에 짧은 머리, 빨간 반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아이. 또래 소녀 리사가 이름을 묻자 자신을 미카엘이라 소개한다.

코를 훌쩍거리고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고 몸을 약간씩 흔드는 버릇이 있는 미카엘은 곧 동네 아이들과도 친해져 함께 웃고 달리고 축구를 하고 수영을 한다. 아이들의 여름이 그렇게 잔잔하게 흘러가고 개학을 2주 남긴 시점이 된다. 

하나밖에 없는 반인데 편성표에 네 이름이 없다고 말하는 리사에게 아이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보다고 말한다. 독특하고 묘한 매력이 있는 아이에게 리사는 호감을 갖고 아이도 리사와 가장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된다. 

집에는 엄마와 귀여운 곱슬머리 동생이 있다. 6살짜리 꼬마 동생 잔은 10살 언니 로레를 좋아하고 늘 로레의 편이 되어 준다.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흐뭇하다. 잔을 데리고 놀러 나간 날 아이는 여느 때처럼 미카엘이 되고, 밖에서 주먹다짐을 하게 되는데 이 작은 사건으로 로레가 남자아이 흉내를 낸다는 것이 알려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상의 시간을 보내면서 굳이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 속에서 굳이 내가 여자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거나 남자여야만 한다.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에게 성별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자 또는 남자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주입되고 조성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당신이 로레 또는 미카엘을 처음 보게 되는 순간 당신은 아마도 그 아이는 ‘소년’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딱 10살 또래 남자아이들의 짧은 머리카락, 골격과 표정, 몸짓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 목소리와 말투, 눈빛과 소년다운 미소...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전형적인 6살 여자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가진 곱슬머리의 소녀가 아이를 향해 ‘언니’라고 부를 때 아마도 당신은 나처럼 살짝 놀라버릴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소년이 아닌 소녀임을 알게 되면 이후 아이들과 어울리며 10살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아이의 일상을 조금은 마음을 졸이며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영화는 로레 또는 미카엘의 여름을 조용히 바라본다. 찬찬히 따라간다. 어떤 개입이나 어떤 선입견이나 어떤 간섭도 없이 아이의 작은 행동반경을 고요히 지켜본다. 그 약간의 거리두기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몰입감을 주고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든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들은 어쩌면 무성의 존재에 가깝다. 서로의 성별은 물론 자신의 성별에도 무감하며 그것이 함께 어울려 놀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로레 또는 미카엘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이는 굳이 자신이 여자임을 자각하지도 않고 굳이 자신이 남자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는 그저 자기자신의 내면에 충실했고 그것은 함께 뛰어노는 친구들에게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 아이의 성별은 그러나 곧 기성세대에 의해 한쪽으로 규정지어진다. 어쩌면 아이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듯 느껴졌던 아빠는 영화 후반부를 넘어서면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이가 좋은 ‘자매’를 키우며 걱정 없이 보였던 엄마는 아이에게 원피스를 입히고 친구의 집을 찾아 사과하게 하고 리사에게 진실을 알도록 한다. 엄마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제 아이는 미카엘이 될 수 없고 오직 로레여야만 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기를 낳는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는 더할 수 없이 귀엽다. 동생을 바라보는 로레와 잔은 신기한 듯 아기를 바라보며 웃는다. 아기는 어떤 성별을 가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로레와 잔도 아직 모를지 모른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렇게 무성의 존재이다. 그 아기도 자라나면서는 엄마에게서 자신이 ‘로레’ 또는 ‘미카엘’임을 인지하고 자각하게 되겠지. 

누군가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성별에 상관없이 한 인격체로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한 인격체를 바라볼 때 성별을 앞서 볼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시선과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레가 아이들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소개하고 소년처럼 놀고 있는 것을 모르던 엄마는 당장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한다. 이유불문하고 친구를 때린 것에 대한 사과는 이제 부차적인 것이 되고 로레가 미카엘로 행동한 것을 사과하고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레 또는 미카엘의 마음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과 가장 친한 리사의 태도와 남자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더 중요해진다. 

사실 아이는 미카엘이든 로레이든 상관없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있는 그대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반면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영화 <톰보이>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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