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부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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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부캐의 시대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08.03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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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의 '부캐' 유드래곤이 3인조 혼성그룹에 도전한 MBC '놀면 뭐하니' 방송 화면 갈무리.
유재석의 '부캐' 유드래곤이 3인조 혼성그룹에 도전한 MBC '놀면 뭐하니'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박재철 CBS PD] 가이드를 잘 만나면 여행이 즐겁다. 낯선 곳을 금세 낯익은 곳으로 만드는 마술은 그의 몫이다. 좋은 가이드의 자질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여행지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다. 적어도 블로거 이상의 스토리텔링이 요구된다. 둘째는 소통 능력. 사람들은 가이드의 입만 바라본다. 친절히 응대하면서 불편함과 아쉬움은 없는지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 

셋째, 여행자들의 취향과 성격 파악이다. 나의 눈높이가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기본자세다. 마지막으로는 돌발 상황에 대한 능숙한 대처다. 타지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여행자 수의 배수쯤 될 것이다. 

이런 좋은 가이드의 조건은, 고스란히 좋은 라디오 진행자의 조건으로 삼아도 무방하다. 그 둘은 위아래 조개 입이 맞물리듯 정확히 포개진다. 프로그램에 대한 넓은 이해부터 청취자와의 공감 능력, 타깃 청취층의 성향 및 관심사 파악과 우발적인 방송사고 대응까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욕심내 보자면 캐릭터다. 한때 ‘one of them’의 존재였다가 ‘only one’의 존재가 되는 순간은 언제나 고유한 캐릭터를 내뿜는 때다.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의 발현은 그 사람이 선 자리를 온전히 빛나게 한다. 

라디오 진행자 중에 이런 캐릭터를 가진 이들이 적잖을 텐데, 그중 방송인 붐은 특히 눈길을 끈다. 그의 프로그램 <붐붐 파워>는 말 그대로 캐릭터 쇼의 ‘붐’을 만들고 있다. 그가 휴가라도 갈라 치면 대타 진행자를 어찌 찾을까 괜한 걱정을 사서 할 정도다.

7080 디스코장의 부스를 라디오 스튜디오로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현장 분위기에 독특한 키치의 색채를 띤 진행은 전례가 있었나 찾아보게 한다. 캐릭터 구축으로 자기 영토화에 성공한 케이스다. 청취층을 넓히는 속도가 예상을 웃돌아 최근 SBS는 <붐붐 파워>를 두 채널에 동시 송출하기에 이르렀다.

캐릭터 쇼에 대한 청취자들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CBS도 얼마 전 <이봉규의 어떤가요>(FM 98.1, 2:05-4:00/PD 이지현)를 론칭했다. 후발주자의 가장 큰 숙제는 늘 그렇듯 선두주자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이다. ‘짝퉁’이나 ‘아류’라는 딱지를 빨리 떼지 못하면 고전하다 이내 사라진다. 

이봉규 CBS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이봉규의 어떤가요' 타이틀 화면.
이봉규 CBS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이봉규의 어떤가요' 타이틀 화면.

<붐붐파워>와의 차별성을 고심하던 제작진은 요즘 유행하는 ‘부캐(부 캐릭터)’에 주목했다. 서브 컬처라 할 만한 부캐의 특징은 대략 세 가지. 먼저, B급 정서의 전면화. 쉽고 싸고 만만한 느낌으로 다가가야 대중의 마음 문턱을 낮출 수 있어서다. 다음은 자기 부정. 예전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캐릭터를 앉힌다. 유재석과 유산슬, 김신영과 김다비는 문화적 지문(指紋)이 전혀 다르다. 서로를 부인하며 달리 소비된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이 마치 가면 놀이처럼 알고 속이고, 알고도 속아주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옅은 길티 플레저를 동반한 이 공모 관계적 게임은 캐릭터와 소비자 사이에 묘한 친밀감을 배가시킨다. 

부캐의 특성을 착안해 <이봉규의 어떤가요>에서는 주부 노래교실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봉골레 쌤’과 신당동 떡볶이집 DJ를 본뜬 ‘허리케인 봉’을 캐릭터화했다. 진행자는 아나운서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내던지고 하급 페르소나로 기꺼이 변신했다. 

무심한 청취자들의 관심을 내 쪽으로 끌어오느라 혈혈단신 밧줄에 온힘을 싣고 있다. 캐릭터 쇼의 관건은 캐릭터의 매력이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고 개성 있는 인물 구성을 위해 매일 고군분투한다. 붐의 아성에 도전장을 낸 호기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말이다. 
 
‘부캐’의 장력(張力)이 이렇게 방송계로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왜 대중은 ‘부캐’에 호응을 하는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눈치 빠른 요즘 세대는 하나로 수렴되는 본질적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에서 이미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학생으로서, 자식으로서, 후배로서 이게 합당한 일인가’ 라는 식의 질문법에 신물이 날 대로 난 심적 상태가 ‘부캐’를 띄운 부력은 아니었을까. 

“내 안에는 무수한 다발로서의 내가 있을 뿐인데 하나의 단일한 자아만이 사회에서 호출되다 보니 그게 ‘나’라고 여기면서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기 동일성, 정체성의 신화를 유쾌하게 깨부수는 사이다 같은 ‘부캐’ 출현에 환호하면서 대중은 소리 없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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