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과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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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과 반지성주의 
[비필독도서 33] ‘반지성주의 시대’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0.08.24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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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 집회 참가자들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8·15 광복절 맞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보수단체 집회 참가자들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8·15 광복절 맞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마스크가 정치적 의견의 표현 수단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학적인 조언들은 종교적, 정치적 신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주장하는 비과학적 유언비어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마스크 대신 그들의 입을 덮었다. “신념은 총알로도 뚫을 수 없다”던 브이의 대사는 완전히 전도(顚倒)됐다.

바다 건너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연단에 오른 종교인은 정치적 이유로 환자 수가 조작되고 있다고 했다. 야외에선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는다며 마스크를 벗기도 했다. 그의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그렇게 밥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자리에, 바이러스의 공포만이 남았다. 

수전 제이코비의 <반지성주의 시대>는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우회로였다. 세속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일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건 아닐 테다. 200여 년 전 건국 이후, 미국을 움직여 온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포착하려는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 본다면, 이곳의 일을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건국의 아버지들과 청교도 성직자, 두 지식인 집단이 기틀을 잡은 신생국가 미국은 19세기 초반 거대한 변화에 직면한다. 서부 개척으로 영토가 증가했고 산업 발달로 자본가 계급이 등장했다. 실용적 지식으로 무장한 기업가들이 존중받았고, 지식인들은 쓸모가 없다고 여겨졌다. ‘기업가 정신’이란 신화를 뒷받침하는 자기계발과 독학은 찬양의 대상이었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자발적 무지를 택했다. 성경과 배치되는 과학적 발견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성경 이외의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식과 문화로부터 소외된 계층에게 복음주의 운동은 효과적이었다. 밀려오는 이민자의 파도는 ‘순수한 미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미국의 ‘타락’을 막기 위해, 성서로 돌아가길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은 전문가 집단에 대한 평가를 뒤집는 계기가 됐다. 행정은 복잡해졌고, 위기는 잦아졌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을 기용한 루즈벨트는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우파들은 전후 매카시즘 운동을 통해 전문가들에게 ‘반국가적’ 인물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그만큼 전문가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1960년대 활발해진 민권운동의 성과들, 가톨릭 신자인 JFK의 당선, 달 착륙 성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반지성주의적 경향의 최종적 패배를 예견하는 듯 보였다. 전후 호황이 만들어 낸 두터운 중산층과, 그들의 공교육에 대한 선호는 이 흐름을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듯 보였다.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JFK가 암살되는 등의 반작용은 있었지만 말이다.

수전 제이코비가  쓴 '반지성주의 시대'
수전 제이코비가 쓴 '반지성주의 시대'

저자는 주류 매체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영역에서 반지성주의가 부활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대항문화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60년대’는 좌우 양쪽에서 모두 과소평가됐다. 민권운동, 여성운동과 같은 반란의 물결은 보수주의자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자극했고, 공교육의 빈틈엔 종교적 근본주의자를 위한 참호가 설치됐다.

1960년대에 등장한 영상매체는 사람들로부터 능동적인 사색을 빼앗아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영상매체가 사람들에게 더 빠르고 더 널리 진실을 전달해 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은 곧바로 배신당했다. 영상 매체는 비과학적인 ‘정크 사상’의 유포에 오히려 더 적합했다. 과학 용어로 치장된 ‘지적설계론’같은 사이비 과학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저자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과 손잡은 정치적 우파의 성공, 그리고 활자 매체로부터 영상 매체로의 급격한 변화가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강화시켰다고 본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동등한 수준으로 대우하는 유일한 나라, 올바르지 않은 과학적 지식을 대통령이 나서서 설파하는 나라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놀라운 예외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다.

저자는 오래된 경향을 단칼에 끊어낼 방법을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지적 능력과 책임감을 갖춘 시민이 되기를 요구한다.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올바른 정보를 거짓과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게을러선 안 된다고 말이다. 공교육 개혁이나, 지식인과 미디어에게 특별한 책임을 요구하는 부분을 덧붙이지만, 핵심은 무지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데 있다.

미국의 상황과 여러 모로 비슷하지만, 한국만의 특징이 있다. 연방정부의 힘이 약했던 미국과 달리 중앙정부의 힘이 강했기에 공교육의 편차는 비교적 적었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과학기술 교육은 성장 동력이기도 했다. 종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분야도 다르다. 차이를 읽어내면서 이곳만의 고유한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무엇인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영상 매체나 소셜 미디어가 트럼프라는 반지성주의의 ‘화신’을 백악관에 입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미디어 종사자들이 저자의 말마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 “특정 유형의 독소를 제거하면 미디어가 아이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안전할 수 있다”고 외쳐오면서 책임감을 떠넘겨 온 것 아니냐는 혐의도 피하기 어렵다.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는 있다. 영상 매체나 소셜 미디어가 아니었다면, 트럼프 현상은 없었을까. 미디어 종사자들은 과연 책임을 다하지 않았던 것일까. 활자 매체만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 복음주의자들과 사이비 과학자들, 그리고 극우파 정치인들은 이처럼 번성하지 못했을까. 영상 매체에 대한 냉소와 활자 매체에 대한 예찬은 동전의 양면이지 않을까.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매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영상 매체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체념할 마음은 없다.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그 가능성을 어떻게 발휘하도록 만드느냐에 따라 사회는 기술에 빚을 진다. 시민교육의 도구로서 영상매체의 가능성을 발휘할 방법을 찾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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