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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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과 정치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10.13 16: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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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뜨끈해지는 추어탕. ⓒ뉴시스
속이 뜨끈해지는 추어탕. ⓒ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만 원짜리 한 장으로도 식욕 돋우는 밥상을 맞기가 힘든 요즘이다. 그런 차에 한 식당에서 예기치 않은 포만감에 행복했다. 연하게 말린 시래기와 구수한 들깨가 곁들여진, 비린내를 제대로 잡은 충청도식 추어탕. 

갓 지은 돌솥밥이 작패처럼 함께 나왔다. 밑반찬은 또 어떤가. 식탁에 먼저 깔리는 밑반찬은 주 메뉴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리트머스 종이다. 직접 담근 달큰한 굴젓과 싱싱한 배추겉절이, 거기에 적당히 삭힌 깍두기와 참기름 향이 듬뿍 밴 콩나물무침까지, 정갈한 4가지 찬이 젓가락질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두 번을 더 추가해 먹었다. 손님으로서 반찬 추가에 심리적 부담이 없다면 그 집은 십중팔구 친절한 곳이다. 친절함의 극점은 밥값이었다. 푸짐한 밥과 찬을 거느린 추어탕 한 그릇이 7천 5백 원. 

셈을 치르면서 주인을 향해 ‘정말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추어탕 한 그릇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이렇듯 따뜻하게 해주다니. 오랜만에 진심 어린 대접을 받았다는 기분이랄까.

식당을 나오면서 가끔 추어탕을 함께 먹던 한 지인이 떠올랐다. 불공정과 불평등 같은 우리 사회의 모순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이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탕 그릇의 열기보다 더한 사회비판의 열기를 내뿜곤 했다. 그런 기질이 사회운동으로, 나중에는 정치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재선에 성공한 그를 TV에서 보곤 한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TV 광고로 화제로 모았던 국밥 광고 화면 갈무리.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TV 광고로 화제로 모았던 국밥 광고 화면 갈무리.

나쁜 것은 하나라도 줄이고 좋은 것은 하나라도 늘리는 일에 나태하진 않겠지? 그간 해놓은 말이 있는데... 정치란 한 사회의 물자와 가치를 정의롭고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이라는데 그 배분의 규칙에서 스스로를 예외로 두진 않겠지? 약자와 소수의 권익을 대의(代議)하겠다며 시작한 일이 해보니 정작 누가 누굴 대신해주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며  우선은 내 것부터 챙기자고 팔을 걷어붙이지는 않겠지?

학력과 경력, 거기다 금력을 가진 이들이 결국은 권력까지 움켜쥐고 출세의 금자탑을 세워보겠다는 저 밑바닥의 본심을 흉하게 드러내진 않겠지? “아니겠지, 아닐거야.” 하면서도 “아닌 게 아닌데?” 하게 된다. 

재산 축소 신고나 피감기관 불법 수주 같은 고전적인 뉴스에는 굳은살이 밴 지 오래건만 1억 중반에 달하는 의원 세비를 또다시 셀프 증액했다거나 민주 유공자를 예우하는 법안을 수혜 해당자가 될 법한 이들이 입법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에서는 자연스레 입이 벌어진다. 조국이나 윤미향, 추미애 같은 이름 뒤에 붙은 ‘사태’라는 단어의 함의를 정작 본인들은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 물끄러미 “정치란 뭘까?”라는 자문이 인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 아니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게 정치라는데, 그렇다면 정치가 ‘최선’의 행복감을 주는 한 그릇의 추어탕만 한 가치는 있는 건가 싶다. 입안을 감싼 추어탕 맛의 잔향이 정치에 대한 단상으로 금세 씁쓸했다. 언젠가 한 시인이 보여준 자기 객관화의 성찰을 지금의 정치에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아직까진 과분한 일 같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 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 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긍정적인 밥/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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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영 2020-10-19 13:20:29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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