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글쓰기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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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글쓰기의 원천
  • 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 승인 2020.10.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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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육지에 있을 때는 누나 부부에게 얹혀살지만 대체로 배를 타고 노동을 하며 살아온 마틴 에덴. 헌칠한 그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거친 손이 그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 마틴 에덴의 삶에 변화가, 그것도 아주 큰 변화가 찾아든다. 우연히 길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청년을 구해준 그는 청년의 집까지 동행하게 된다. 기품이 있고 멋진 저택 앞에서 마틴은 망설이지만 순수하고 격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청년은 말한다. 우리 부모님은 열려 있는 분이라고. 

하지만 마틴은 현관 앞에서 보이지 않는 거부를 당한다. 그 집의 일을 돌보는 메이드에게서말이다. 집 안에 발을 들여 놓은 그는 엘레나를 만난다. 엘레나는 품위 있고 우아하게 그리고 적당한 친절과 호감을 표하며 마틴에게 동생의 일을 감사한다. 엘레나는 그에게 보들레르를 알려주고 책을 빌려주고 피아노를 연주해 주고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렇게 마틴에게 엘레나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어 준다. 마틴은 엘레나가 빌려준 책을 탐독하고 문자를 읽어 나간다. 취약한 문법을 보강하고 이야기를 접하며 상상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리고 스스로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타자기를 구입한다. 

배를 타며 모아 놓은 돈을 쪼개 타자기를 구입하고 더 이상 막노동을 하지 않는 그는 매형의 구박에 집을 나오면서도 글을 쓰겠다는 열망을 놓지 않는다. 그의 두 손은 이제 막노동의 현장을 떠나 타자기를 두드리며 활자들을 찍어낸다. 날 것의 이야기들, 거칠어서 그 어느 잡지나 신문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과 동시에 엘레나와 함께 하겠다는 열망을 담은 것이다.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마틴과 엘레나이지만 서로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엘레나의 집에서 있던 파티에 간 날 마틴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마틴이 사는 동네에 발을 들였던 엘레나 또한 자신의 세계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는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고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은 사랑만으로 넘어서기에는 벅차 보인다. 

드디어 잡지에 기고를 하게 된 마틴은 이후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지만 엘레나가 없는 그의 삶은 어딘가 공허하다. 사람들이 곁에 있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비어 가고 실없어진다. 그와 더불어 분열의 조짐을 보여 오던 사회는 점점 위태해지고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삶 앞에서 마틴은 냉소적이 되어 간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마틴 에덴>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관심을 끌어 왔다. 잭 런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로 배경을 옮겨오면서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내면을 엮어낸 수작이다. 

엘레나를 스스로를 고양시키며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목표와 소망하는 바를 향해 한 걸음씩 떼는 마틴 에덴의 모습은 어딘가 구도자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마틴 에덴의 그런 면모가 이 영화를 상당히 매혹적으로 보게 되는 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결핍은 쓸쓸하고 애처롭지만 그의 강인한 의지는 눈물이 핑 돌만큼 감동적이니 말이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는 클로즈업이 많이 사용된다. 엘레나의 얼굴, 마틴의 얼굴, 악수하는 손 그리고 일상의 배경이 되는 혹은 일상의 부분이 되는,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들. 주인공과 길거리를 지나거나 작업을 하거나 쉬고 있는 선원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교차되면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그들 모두 각자의 삶과 일상을 영유하고 있기에 그들의 얼굴 또한 클로즈업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우리’가 모여 사회를 이루고 때로 분열하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마틴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발은 현실에서 조금 떠오른다. 그런 그의 발을 잡아주는 마리아는 또 한 번 인간의 삶의 다면을 보여 준다. 꿈을 꾸는 마틴과 그런 마틴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마리아 아줌마. 두 사람의 손은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응원하고 고마워한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은 아닐까. 

<마틴 에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푸티지 컷이다. 터널, 꼬마 소년, 침몰하는 배... 이런 컷들이 지속적으로 삽입이 되어 있는데 마틴 에덴의 기억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한 푸티지들은 누군가의 기억 혹은 향수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왜인지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한 마틴 에덴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뭉클거림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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