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편집' 유혹을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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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편집' 유혹을 느낄 때
박지선 모친 유서 보도한 기자는 일말의 가책 느꼈을까
'욕 먹어도 화제는 되겠는데' 고민에 빠지는 예능 편집의 순간들
출연자 상처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이미지 실추도 불가피
  • 허항 MBC PD
  • 승인 2020.11.20 13: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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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허항 MBC PD]  얼마 전 한 언론사의 기사가 큰 논란이 됐다. 개그우먼 故 박지선 씨 어머니의 유서 내용을 공개한 기사였다. 유족 측이 공개를 원치 않는다고 밝힌 지 불과 만 하루도 안 되었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기사는 포털사이트 메인에 올랐고, 압도적인 클릭 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기사를 접한 네티즌 대부분은 댓글을 통해, 기자와 언론사를 성토했다. 유족이 원치 않았던 일을 굳이 이렇게 기사화한 저의를 묻기도 했다. 

해당 언론사 측은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고, 유족 측도 경황이 없었던 탓인지 별도의 이의제기가 없어 논란은 흐지부지 됐다. 몇몇 언론사는 해당 보도를 그대로 옮기며 고인이 앓았던 병에 대해 정보성 기사를 가장한 어뷰징 기사를 내기도 했다. 고인의 이름이 이런 기사에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유족들이 뒤늦게 알고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차마 가늠되지도 않는다. 

어쩌다보니 리얼 관찰 프로그램을 많이 경험해본 편이다. ‘관찰’이라는 포맷인 만큼 카메라는 출연자의 모든 순간, 모든 동선을 찍는다. 그러다보면 출연자의 매력적인 부분과 함께 그렇지 않은 부분도 담긴다. 물의를 일으킬 만한 발언이 담기기도 하고, 방송으로 노출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들이 고스란히 녹화되기도 한다.

날 것 그대로의 한 사람이 담긴 원본을 신중히 편집해, 출연자의 매력을 최대한 어필하면서 예능적인 재미도 주는 것이 리얼 관찰 프로그램 PD의 몫이다. ‘비호감’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잘라내고, 출연자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부각될 수 있는 상황은 부각해 보여준다. 매우 예민한 성격의 편집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작업과정도 매우 고되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PD 입장에서 ‘악마의 유혹’ 비슷한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출연자의 이미지상 좋지 않을 수 있는데, 방송으로 낼 경우 꽤 큰 화제성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요소를 발견할 때다. 한마디로 ‘이거, 욕은 먹겠지만 그만큼 화제는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경우, 방송 전 날까지 제작진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기도 한다. 화제성이 올라가면 결국 출연자에게도 좋은 것 아니냐며 그냥 방송을 내자는 의견이 있다. 반면, 잠깐 화제성 얻자고 한 사람을 악플의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냐는 의견도 나온다.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땐 이 악마의 유혹이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속칭 ‘어그로’, 즉 부정적인 논란으로나마 관심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악마의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슈퍼스타K'.ⓒMnet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악마의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슈퍼스타K'.ⓒMnet

하지만 출연자가 공개를 꺼리는 부분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행위는, 잠깐의 화제성과 맞바꾸기엔 생각보다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출연자의 인격적 상처가 상당함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프로그램의 이미지도 실추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도 먼저 연출자는 출연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유족이 공개를 꺼린 유서 내용을 공개한 언론사와 해당 기자는 본인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을까. 아마 클릭 수나 화제성 면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독’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정보를 주었다는 사실에 긍정적인 자평을 내리고 있을 수도 있다. ‘기자 스스로 일말의 가책은 있겠지’ 하는 기대도 나무 순진한 생각인 것 같다. 

둘러보면, 기사뿐 아니라 프로그램들 중에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 같은 경우가 있다. 매주 출연자를 ‘악플’의 도마 위에 올려놓으려 작정한 듯한 예능 프로그램들도 보인다. 다시 안 볼 일반인이라며 평범한 사람을 악마의 편집 대상으로 삼는 프로그램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은 ‘화제성’, ‘시청률’ 등의 성과 뒤에 유야무야되곤 했다.    

연출자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한 인격체를 논란의 용광로 안에 던져 넣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유족의 진심이, 한 기자의 ‘기자정신’에 깡그리 무시되어도 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그램이나 한 개의 기사가 한 사람의 인격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한편으론 나 역시 순간의 해이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연출 욕심과 맞바꾸려한 적은 없는지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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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23:37:11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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