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3일’ 속리산 단풍 촬영에서 빠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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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3일’ 속리산 단풍 촬영에서 빠뜨린 것 
앙상해진 정이품송과 떨어진 낙엽에 '씁쓸'
속리산에 오른 96세 할머니 암환자 보고 긍정 에너지 얻어
  • 이은미 KBS PD
  • 승인 2020.11.25 11: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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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단풍 엔딩' 편 화면 갈무리.
지난 15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단풍 엔딩' 편 화면 갈무리.

[PD저널=이은미 KBS PD] 지난달은 속리산에서 답사와 촬영을 하며 엿새를 보냈다. 산을 온 사람들 중에는 불륜 커플들이 있으니 무조건 얼굴에 모자이크를 쳐야 한다는 얘기를 동료 PD들이 하곤 했는데, 그건 거짓말인가 보다. 많은 이들이 갑작스런 인터뷰에 응해줬고, 내용도 가을 분위기와 어울렸다. <다큐멘터리 3일> 방송 시간 55분은 속리산의 풍광과 산행객들의 사연을 담기에 짧게 느껴졌다. 

그런데 앗! PD가 너무 가을 단풍 분위기에 취해서 일까. 빠뜨린 게 있었다.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방송을 보셨는지, 며칠 후 전화를 하셔서 ‘정이품송은 왜 안 나오냐’고 물으셨다. 부모 세대는 속리산을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지로 기억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과 법주사가 등장하지 않으니 궁금했나 보다.  

정이품송은 속리산 입구에 있는 소나무 이름이다. 조선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길을 가로막는 소나무 가지 때문에 지나가기에 곤혹스러웠는데 그 소나무가 가지를 스스로 들어 올려 일행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세조는 이 소나무를 기특하게 여겨 정2품이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이다. 이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 정이품송은 커다랗고 웅장한 천연기념물 소나무였다. 그만큼 정이품송은 속리산의 마스코트다.

촬영 차량이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갈 때 제작진 모두 ‘정이품송, 정이품송 어딨어’ 하며 소나무를 찾았다. 그런데 몇 십년 만에 마주한 정이품송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소나무의 절반이 날아가 앙상하고, 남은 가지들도 여러 개의 지지대에 간신히 기대고 있었다. 

정이품송의 처량한 모습이 보기 싫었다. 마치 젊은 시절 당당했다가 나이가 들고 약해진 아버지를 보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한들, 사방의 붉은 단풍도 바람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에 허망한 기분이었다. 

지난 3일 방송된 '다큐 3일-단풍 엔딩' 화면 갈무리.
지난 15일 방송된 '다큐 3일-단풍 엔딩' 화면 갈무리.

희한하게도 이번 촬영에는 안쓰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환우회 모임, 환경과 안전관리 정책 때문에 운영하던 휴게소를 철거해야 하는 사장님, 그나마 평평한 길을 찾아 산책 나온 장애인 가족, 취업난 때문에 고민인 청년들과 그 부모들. 마음속에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내내 연민을 느꼈던 제작 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96세의 한 할머니이다. 이십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야영을 좋아해서인지, 증손자 식구까지 4대에 걸친 대가족이 캠핑을 왔다고 했다. 할머니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 텐트에서 앉을 자리를 옮길 때마다 작고 여린 몸에 충격이라도 갈까 조바심이 들었다. 편집하며 화면을 되풀이해 보면서도 긴장이 될 정도였다. 

곧 백세를 바라보는 어르신은 아무리 캠핑카라지만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자느라 불편했을 텐데, 오히려 꿀잠을 잤다고 하신다. 상황에 맞추면 되지 안 되는 게 어디 있냐고 되물으셨다. 발음도 또박또박, 농담까지 던지신다. 주어진 것에 적응하면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신단다.  

 남들을 걱정했던 감정이 오만했던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워졌다. 사실 인터뷰를 곱씹어 보면, 그 안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있었다. 암 투병 환자들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산행을 했고, 휴게소를 철거해야 하는 사장님은 좋아하는 산에서 지낼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고 둘레길을 걷는 가족은 서로를 챙겼고, 아들 취업 때문에 고민인 부모는 정상에서 소원을 빌었다며 모두 힘내자고 외쳤다.

 앙상해진 정이품송과 96세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700년 가까이 세월을 견뎌내고 100년 가까이 세상을 지켜본 존재들이다. 인생을 더 많이 아는 양반들이다. 인생은 길섶에 보물을 숨겨놓는다고 한다. 그걸 알기 때문에 다들 있는 힘껏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40년 남짓 살아온 PD 눈에는 숨겨놓은 행복이 아직 눈에 안 띄었나 보다. 단풍을 촬영하러 갔다가, 또 한 번 인생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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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0-11-25 17:25:20
상강.중양절 나들이에 마스크착용,거리두기,손 잘씻기등은 필수. 유교문화권의 24절기중 하나인 상강(霜降). 서리가 내리며 전국적으로 단풍놀이가 오랫동안 행해지며,낙엽의 시기입니다. 양력 2020년 10월 23일(음력 9월 7일)은 상강(霜降)입니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서는 是月也 霜始降(이 달에 비로소 서리가 내리고)라 하여, 상강(霜降)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교의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을 중심으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신들이신 오제(五帝)께서 베푸시는 아름다운 절기(상강), 명절(중양절). 상강(霜降)절기의 단풍철, 중양절(重陽節)의 국화철이 오랫동안 한국의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게 됩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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