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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 끊겨 지인 식당일 돕다가 창업까지
메뉴 개발하고 음식 내놓는 식당 일, 프로그램 만드는 PD 업무와 비슷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나다운 삶, 나다운 글쓰기‘ 주제로 쓴 글을 추려 싣는다. <편집자 주>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역 인근 식당가의 모습.ⓒ뉴시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역 인근 식당가의 모습.ⓒ뉴시스

[PD저널=신현철 독립PD] 고등학교 1학년, 비 오던 어느 날, 성당에서 한 신부님을 만났다. 에콰도르에서 선교를 하셨다고 했다. 나는 그 만남으로 선교사가 되고 싶었고 가톨릭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 뒤 군대를 마칠 때까지 10년 정도 예비 신부로 살았다.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사제로 서품 받기 1년 전에 나는 신학교를 자퇴했다. 그 옷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이었다. 

그 뒤 대학원에 진학하고 직장을 다녔다. 기자 생활 3년을 하고 난 뒤, PD로 진로를 바꾸었고 20년째 그 길을 가고 있다. 80분짜리 아침 생방송을 연출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나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일이 줄어들고, 정부 지원 사업 피칭에 연이어 떨어지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됐다. 제작팀은 해체됐고,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주던 강사 일까지 뚝 끊겨 버렸다. 

그 뒤 <제주도의 사계>를 제작하기 위해 약 1년 정도 제주도에 머물게 되었는데, 체류비를 마련하는 게 급했다. 나의 걱정을 알아챘는지, 제주도에서 식당을 하던 동생이 자신의 빈 숙소를 그냥 내주고, 아침 마다 밥상을 차려 주었다. 돈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돈 내려면 나가라면서….

미안한 마음에 설거지부터 거들었다. 큰 식당 설거지는 내가 집에서 하던 설거지가 아니라 ‘설거지 공장’이었다. 워낙 크고 유명한 식당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이 줄을 섰고 설거지할 그릇은 끝이 없었다. 첫날은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지만 며칠 지나니 자세도 잡히고 몸도 적응해 버틸 만 했다.  

주방은 전쟁터다. 설거지를 하다가 “구이 구이” 하면 가서 생선을 뒤집고, “조림 조림” 하면 가서 조림을 홀에 내주었다. 어느 밤 동생과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데 동생은 내게 “소질이 있으니 식당을 해도 되겠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제주 음식을 하는 식당을 하면 어떻겠냐”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그날 밤, 나는 소주를 들이키며 허허 웃었지만, 다음 날은 벌써 비행기를 탄 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사실 제일 힘든 것은 자괴감이었다. 20년간 몸 담던 영상 일을 던지고 식당을 하다니, 이젠 퇴물이 된 건가 싶었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연민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우리 가족이 살 길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 세컨잡으로 식당 하나 열어 보자!” 큰 모험을 하기로 결정하고, 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일산에 제주 향토음식 전문 식당을 열었다. 아내의 허락을 받고 6개월 정도 식당에 기거하며 모든 음식을 만들었다. 제주에서 배운 대로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갔다. 어느 날, 간판만 달고 개업식 없이 슬쩍 문만 열어 보았다. 신기하다! 손님이 들어 온다! 음식을 먹는다!
 
이 무렵 우리나라 정권이 바뀌었다. 한 일간지가 보도한 ‘블랙리스트 명단’에 내 이름이 실려 있었다. 왜 내 이름이 거기 있을까? 동명이인인가? 그렇다면 더욱 억울한 일. 아마도 내가 강단에서 강의할 때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집회에 참석한 게 원인이 었을까. 어쨌든 나는 지나갔던 많은 일의 퍼즐을 맞춰 보게 되었고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자 또 거짓말 같이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식당 일로 강의를 하지 못했다. 

속이 뜨끈해지는 추어탕. ⓒ뉴시스
어떤 음식을 만들까 고민하고 요리해 손님에게 내놓는 식당 일과 PD 일은 어찌보면 닮았다. ⓒ뉴시스

1년은 꼬박 식당 주방에서 일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우는 일을 많이 했던 나에게 순수 육체노동은 새로운 활력이었고, 복잡한 내 머리를 씻어주는 청량제였다. 

어느 날, 홀이 보이는 마당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홀 안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한 가족이 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 3대가 함께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순간. 홍수환의 단단한 주먹 같은 것이 뱃속에서 목구멍 쪽으로 훅 치고 올라왔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있고 식당일이 정말 나와 맞는구나, 식당일, 잘만 하면 되겠구나, 그래 나는 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 그리고 깨끗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고 살았다. 3년 정도 지난 후에 주방 일을 직원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지금은 훌륭한 직원들이 나를 대신해 그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면 다시 컴퓨터 앞에서 다큐멘터리 기획서를 작성하고 몇 군데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어찌보면 식당 일은 PD가 하는 일과 닮아있다. 어떤 음식을 만들까 기획하고 재료를 구매하고 그것을 요리해서 손님들에게 제공한다. 손님에게 나갈 때 홀에는 어떤 음악을 틀고, 어떤 테이블과 접시, 어떤 반찬, 어떤 서비스를 더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스태프를 잘 이끌어야 한다.

식당은 다행히 날로 발전해 연간 매출 20억원을 넘겼다. 나는 가족들의 양해 아래 총알을 준비하고 있다. 내 작품 제작비를 직접 마련할 계획이다. 당장의 꿈이 있다면 나와 함께 하는 스태프가 더욱 쾌적하게 일하고, 좀더 넉넉한 보수를 받으며 그들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해 주는 일이다.

또 황희 정승의 밥상은 아닐지라도 어느 시골 알려지지 않은 맛집, 마음 좋은 아주머니의 밥상처럼 몸에 좋고, 착한 밥상 같은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다 보고 나서 “아, 간만에 잘 먹었다”, “뭔가 건강해 지는 느낌이다”, “우리 엄마 생각이 나네”, “고향 생각이 절로 나네” 이런 평을 들을 수 있는 작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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