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객' 김현식이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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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 김현식이 남긴 유산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12.08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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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현식의 30주기를 맞아 제작되는  김현식 리메이크 앨범 '추억 만들기'에 옥주현, 규현 등이 참여한다고 제작사 슈퍼맨C&M이 밝혔다. ⓒ뉴시스
고(故) 김현식의 30주기를 맞아 제작되는 김현식 리메이크 앨범 '추억 만들기'에 옥주현, 규현 등이 참여한다고 제작사 슈퍼맨C&M이 밝혔다. ⓒ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저 멀리서 쓸쓸함 하나가 걸어온다. 
새벽안개처럼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다가온다. 
습기를 머문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간의 짙은 고됨이 눈가에 스친다.
 
김현식의 노래 ‘사랑했어요’의 전주를 듣고 있노라면 외로운 길손이 거느리고 올 법한 분위기로 주변을 서서히 물들인다. 방랑객인 그는, 길 위를 거닐다 돌아온 자다. 오래전 사랑에 자신을 하얗게 불태워 버렸던 사람. 이젠 돌아와, 잿더미 속에서 희미한 불씨를 찾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지난 11월 1일은 그가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된 날이었다. 한때, 그의 노래 속에서 내밀한 정서를 키워온 이가 적지 않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떠났건만, 그가 드리웠던 음악의 그늘은 깊고도 짙었다. 김현식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가객(歌客)’이라는 별칭이 붙는다. 가객은 시조 따위를 잘 짓거나 창(唱)을 잘하는 사람을 이르던 말인데, 그가 그린 음악 궤적을 보면, ‘가객’이라는 칭호가 주인을 제대로 찾은 듯하다. 

우선, 장르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 그는 정주민이기 보다는 유목민에 가까웠다. 장르의 교섭과 혼합을 자신의 음악적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 과정에서 고유한 색깔을 지닌 노래가 여럿 탄생할 수 있었다. 더욱이 블루스, 발라드, 소울, 펑키, 록 등 외래음악들을우리의 정조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선율과 가사 등에 주목해 노래에 착근시켰다. 이른바, 외래 음악 장르의 토착화다. 

‘메신저스’,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등의 밴드를 직접 구성하거나 참여해 활동하면서, 창법 역시 타령조를 가미해 
외국 보컬을 마냥 카피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보이스 컬러를 냈다. 덕분에 미성(美聲)뿐만 아니라 때론 거칠고 둔탁해도 대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수로 각인될 수 있었다. 임재범이나 이승철 등은 그런 그의 음악적 자세와 태도를 존경하며 닮고 싶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그가 마지막까지 보인 예술혼은, 김현식이라는 책에서 자주 펼쳐질 페이지에 꽂혀있는 책갈피다. 간암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는 녹음실에서 레코딩 작업을 했다. ‘내 사랑 내 곁에’, ‘사랑했어요’, ‘추억 만들기’, ‘이별의 종착역’ 등 다수의 히트 넘버가 담겨있는 6집 앨범은 병마와 싸우며 녹음한 곡들이다. 이듬해 100만 장이 넘게 팔리면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지만, 6집 앨범은 그의 사후에 발매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라이브 역시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무대 분위기와 연주자들에 따라 다르게 불러, 그의 창법을 모방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만큼 음악에 자신의 고유한 낙관을 진하게 찍었던 뮤지션이었다. 병색이 짙은 와중에도 탁성으로 무대 위에서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들을 혼신의 힘으로 부르던 자유로운 소리꾼의 모습은 그를 잊지 못하게 하는 장면 중에 하나다.      

음악적 교류와 협업으로 그가 남긴 유산 또한 남다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언더그라운드 사운드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음반 기획사가 동아기획이다. 소속되었던 가수는 김현식을 비롯해 조동진, 들국화, 시인과 촌장, 한영애, 신촌블루스,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장필순, 빛과 소금, 이소라, 푸른하늘, 한동준, 박학기, 김장훈, 유영석, 코나 등 그 이력이 다채롭고 화려하다. 

동아기획은 그 당시 단순한 음반 기획사가 아닌 재즈와 블루스, 록과 포크 등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가능하게 했던 터전이자 새로운 음악을 키운 인큐베이터였다. 김현식은 동아기획에 말 그대로 맏형이었다. 그는 이곳을 매개로 뛰어난 음악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비처럼 음악처럼’의 박성식, ‘가리워진 길’의 유재하, ‘여름밤의 꿈’의 윤상, ‘내 사랑 내 곁에’의 오태호 등을 직접 끌어들여 자신의 앨범에 작곡가로 참여시켰다. 그의 음악적 자장(磁場) 안으로 들어온 후배들은 이후에 우리 가요계를 두텁게 했다.

누군가를 기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책과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서부터 비석이나 동상, 생가나 거리 조성, 명예의 전당 건립까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추모자의 입장과 선호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정작 추모 대상은 어떤 방식의 기억을 원할까 잠시 생각해본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되살아나길, 특히나 창작자라면 남겨진 작품이나 성과물이 상업성이 아닌 예술성으로 접근되고 해석되길, 그리하여 기념이나 애도가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띠며 이어지길 바라지 않을까? 한 세대를 대표했던 뮤지션이 떠나고 30년이 흐른 후 그를 기리는 나만의 방식을 고민하며 그의 노래 목록들을 살펴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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