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가치', 어디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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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가치', 어디서 나오나
[비필독도서 38]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0.12.11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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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벨이 울려 나가보니 서명 용지를 든 주민 한 분이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 안 계세요?” 그날은 나만 휴무였다. “서명 대신 해주시겠어요?” “제가 해도 되나요?” “그럼요, 다 좋은 일 하는 건데요 뭐.” 무슨 좋은 일일까 싶어 서명 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파트 이름 변경 동의서. “이름을 바꾸나요?” “이젠 브랜드 아파트 시대지요.”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도 브랜드를 가질 권리는 있으니.

건설회사는 너무 오래된 아파트라서, 브랜드 가치 때문에 최신 아파트 이름을 함부로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아파트 ‘민주주의’는 위대했다. 외벽엔 페인트공들이 솔방울처럼 매달렸다. 도색을 새로 해도 오래된 티를 숨길 수 없는 아파트에 최신 브랜드가 새겨지는 데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낡아버린 놀이터의 그네가 내는 삐걱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돈으로 낡은 부대시설들을 고치는 게 더 ‘가치’있는 투자이지 않았을까?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었겠지만, 동과 호수가 적혀 있는 서명 용지에 반대를 표시할 용기를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오래 머물기 좋다고 홍보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지워졌다. 이름이 바뀌었으니 가격이 오를 거란 기대에 부푼 사람들의 목소리만 아파트 사이사이를 채웠다. 아파트 민주주의의 ‘성과’였다.

정헌목의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를 다시 집어 든 건 이 성과를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저자는 수도권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사례를 통해 단지 안에서 가치가 충돌하는 모습을 자세히 그려낸다. 저마다 다른 가치를 이야기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한국에서 아파트가 사람들의 삶에 파고들었던 역사적 과정을 저자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원래 아파트는 저소득층을 위한 집단 거주지로 시작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고, 강남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제 아파트는 안전하고, 새로운 생활방식을 영위할 수 있고,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간 정부 역시 인구 분산에 유리하고, 안정적 지지도 확보할 수 있는 아파트를 주요 주거 대책으로 내세웠다.

저자는 외환위기 당시 아파트 미분양 물량을 해소하고 건설 경기 활성화를 위해 분양가 상한제 등의 조치가 해제되면서, 아파트의 고급화·차별화 전략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본다. 아파트는 외부의 하층민과 격리된 안전한 공간이자, 사회적 과시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0년 넘게 이어진 브랜드 개명 열풍은 그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저자 정현목의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아파트 이외의 자산 증식 사다리가 사라진 한국에서, 아파트 가격은 민감한 주제다.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재건축은 최고의 자산 가격 상승의 도구였다. 재건축 이후 새 아파트에 들어갈만한 돈이 없는 거주민들은 쫓겨나고,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꾼과 중산층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머무르기보다 떠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시세와 직결되는 집의 주거 환경은 점차 개선되었지만, 단지의 외부 공용공간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현안에 대한 무관심이 예의처럼 받아들여진 결과, 단지 내 주민들의 이해관계에 직결된 문제를 다루는 자리를 소수가 쉽게 차지하여 전횡을 저지르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몇몇의 사람들은 이를 견제하고자 열정적으로 행동했지만, 임차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이곳을 오래 머물 곳으로 생각하기란 어려웠다. 

저자는 2008년 전후로 찾아온 아파트 가격의 정체 상황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본다. 예전처럼 반복되는 매매를 통해 자산을 불려나갈 수 있다는 믿음은 지속되기 어려웠고, 예상보다 오래 한 곳에 머물러야 하는 주민들은 그 동안 외면했던 공동 공간의 ‘삶의 편의’에 관한 고민들에 직면해야 했다. 꾸준히 아파트 공동체의 활성화를 원하던 주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였다.

단지 내 안전사고로 인한 한 아이의 사망 사건은, 거주민들이 아파트 단지가 공동 운명체이자 함께 대처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는 정치 공동체임을 깨닫게 했다. 물론 그 열림의 순간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저자는 이 사건이 오히려 아파트 공동체 안에 실생활에 영향을 미칠 사건들을 논의할 수 있는 공적인 장이 없었음을 알려주는 사례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아파트 공동체를 바라보는 상이한 이상이 경합하는 순간으로서의 가치가 있었지만 말이다.

책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독자는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같이’ 사는 아파트의 ‘가치’가 무엇인지 물을 때다. 아파트 가격이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는 시기에, 이 책에서 언급한 ‘가능성’은 더더욱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무관심을 넘어, 공동체로서 아파트 단지는 존재할 수 있을까? 글을 마무리하며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걸려있던, 코로나19 환자가 있는 병원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는 데 찬성하느냐는 공개 설문지에 과감히 반대를 표시했던 소수의 주민들을 확인했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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