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주거 절벽, 응답 없는 정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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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힘의 충돌과 균열
끊어진 곳에 다리는 생길 것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가운데 신규 확진자 숫자가 나흘연속 1,000명대를 기록한 19일 서울 중구 시청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중구임시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뉴시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가운데 신규 확진자 숫자가 나흘연속 1,000명대를 기록한 지난 19일 서울 중구 시청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중구임시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외부의 힘을 받은 지각이 두 개의 조각으로 끊어져 어긋난 것을 ‘단층’이라 한다. 학창시절, 모형을 통해 단층이 생기는 과정을 학습했다. 두 힘의 충돌로 지구의 외피가 찌그러지는 현상. 그래서 생기는 협곡과 절벽. 요즘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현상이 빈번하게 확인된다. 

삶의 단층을 만든 외력(外力)의 하나는 ‘밀어내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버텨내는 힘’이다. 머물려는 욕망과 내쫓으려는 의지, 그 둘이 충돌하는 곳에서 거칠고 날카로운 단층면이 생겨난다. 평탄했던 하루하루 삶을 더 이상 영위하기 어려워진 현실, 우리는 지금 어떤 절망과 낭패의 민낯을 마주하고 있나? 현미경을 들이대고 우리 시대의 단층면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이 이제 방송 언론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숙제가 됐다.  

가장 먼저 둘의 힘이 충돌하는 곳은 삶의 한복판이다. 바로, 바이러스와 백신이 벌이는 각축장이 된 ‘지금, 여기(Now, here)’다. 이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예외의 장소는 없다(Nowhere). 

전 세계적 규모의 전염병 창궐은 구석구석에 죽음의 공포를 유포시키면서 그동안 정상이었던 많은 것들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있다. 마스크는 내의처럼 의복의 일부가 된 지 오래고, 접촉의 최소화가 서로에 대한 배려가 됐다. 집 밖은 배달의 소음이, 집안은 칩거의 우울이 매연처럼 가득하다. 

지루해도 반듯했던 트랙을 달리던 일상을 탈선시킨 이 바이러스는 최근 국내 확진자가 천명이 넘으면서 더욱 강고하게 확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버티려는 힘만큼이나 인간의 축출 의지 역시 뜨겁다. 

여기저기서 백신 탄생의 소식이 전해진다. 큰 부작용 없이 바이러스가 백신에 순순히 굴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거기다 현재 3無(의료진·병상·백신)의 위기감은 바이러스의 존속 쪽에 추 하나를 더 얹어주고 있다. 

코로나 19 이후를 우리는 뉴노멀(New Normal)이라 부른다. 그러나 New라는 단어를 감싼 정감은 ‘들뜬 설렘’이기보다는 ‘냉혹한 두려움’에 가깝다. 앞으로의 미래는 우리 일상을 어떤 문법으로 새로 쓸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단층은 정치사법권에서 생기고 있다. 뽑아내려고 장도리를 든 힘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안 뽑히겠다고 말뚝처럼 버티고 선 힘이 있다. 한쪽은 ‘검찰개혁’을, 또 다른 한쪽은 ‘정치적 독립’을 명분으로 두 권력이 충돌하고 있다.

파열음 또한 엄청나다. 일종의 활극을 연상케 하는 칼싸움이다. 노회한 검객과 그에게서 칼을 빼앗으려는 또 다른 칼잡이의 혈투. 먼저 칼을 빼든 이의 공격이 예상과 달리 날카롭고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고 둔탁했다. 

그로 인한 불협화음에 세상은 피로감에 휩싸이고 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는 위엄을 주지만, 칼집을 나오면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는 위엄보다 오래 가지 못한다. 칼 사용이 신중하고 빨라야 하는 이유다.  

‘문민 통제’인가 ‘검찰 길들이기’인가. 적당한 양시론도 바람직한 양비론도 이제는 무기력하다. 결국 ‘너는 누구 편이냐?’ 묻지만 믿을만한 쪽을 선택한다기보다는 덜 불신하는 쪽을 골라야 하는 선택지다. 

“이 싸움은 그래서 권력 투쟁일 뿐 공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구혜영 <추·윤 싸움 그 비극적 관람> 경향 12/11) ‘공적 감정’,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장삼이사들의 ‘정당한 분노’. 뭔가 옳은 일에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의로운 조바심’. 

두 권력의 충돌이 만든 이 거대한 지각 변동에서 정작 시민들의 응집된 격정과 구체적 실천은 아직 찾기 힘들다. 늘 그렇듯 절대선과 절대악의 충돌은 현실에서는 없다. 다만 지리멸렬한 이 힘의 다툼이 우선은 쭉정이를 솎아내는 키질이 되길 바랄 뿐이다.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커다란 단층이 생기는 마지막 장소는 우리의 주거 공간이다. 비워 달라는 집주인과 못 나겠다는 임차인 간의 갈등은 갈수록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무주택자들이라면 말 그대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상황이 됐다. 집 사기에 영혼을 끌어 모은다는 ‘영끌’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무람없이, 영혼 없이 유통된다. 

임대차 3법이 몰고 온 우리 주거문화의 현주소는 신산스러움 그 자체이다. 세입자는 기존 2년에 추가로 2년을 더 연장할 수 있고, 전·월세 가격 상승은 전 임대료의 5%로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법은, 주거 권리를 보호한다는 입법 취지와는 달리, 현재까지 그 반대 방향의 효과를 내고 있다.  

전세는 말할 것도 없고 매매 역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결국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주거 권리 보호는 고사하고 주거를 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증발해버리고 있다. 전셋집을 보려고 돈을 내며 줄을 서고, 이주를 위해 이사비에 웃돈까지 주며 읍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시장의 ‘생리’에 대한 고려 없이 규제 일변도의 ‘법리’만을 밀어붙일 때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시장에서 제일 취약한 계층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위정자들은 옳은 길로 가는 단기간의 성장통쯤으로 치부하나 지금의 고통에서 그들은 언제나 예외다. 다주택자이거나 부동산 폭등의 수혜자이거나 아니면 법 시행 전에 증여 등으로 출구 전략을 짜놓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격언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례로 언젠가 이 법이 거론될지도 모를 일이다. 

의료, 사법, 주거 어쩌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라 할 만한 곳에서 크나큰 힘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균열과 지진에 골짜기와 절벽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땅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은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절망에 신음하며 절규할 뿐이다. 출구는 있는 것인가? 끊어진 곳에 다리는 놓일 것인가? 

많은 이들이 정치에 희망을 건다. 결국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작동되어야 할 때와 장소에서 정치는 실종됐다. 부름에 대한 응답(response)을 책임(responsebility)이라 한다. 절박한 부름에 우리의 정치는 아직 제대로 된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무책임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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