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삶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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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가발다 원작 각색한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스틸 이미지.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스틸 이미지.

[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진행)] 환한 빛이 가득한 공간에 있는 가족의 분위기가 좋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나타나는 즐거운 표정, 밝은 표정, 서로를 신뢰하는 몸짓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머니와 네 자녀, 그들의 배우자, 어린 아이까지 이 가족은 참 따사롭고 다정해 보인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한때가 늘 그렇게 지속되겠는가.

장 피에르. 네 남매의 맏이. 어머니의 든든한 아들이자 회사를 경영하는 유능하고 따뜻한 남자. 든든한 아내가 있고 귀여운 아이가 있고 동업자이자 믿고 기댈 구석인 친구가 있다. 이만하면 괜찮다. 그에게 큰 걱정은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장 피에르는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든. 나이든 어머니도 큰 아들을 대견해 하며 마음의 지지대로 삼고 있는 듯 보이고 아내와 자녀도 그렇다. 동생들도 다들 제 앞가림을 하고 있지만 한 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면 동생들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 피에르에게 기대어 있다. 

그런 장 피에르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오고 그 전화는 옆을 볼 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간수하느라 힘을 쏟아 열심히 달려 온 그에게 묘한 감상 하나를 던져 준다. 

전화를 한 사람은 옛 동료인 헬레나.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헬레나는 오래 전에 연극계를 떠난 장 피에르와는 여전히 무대에 선다. 여전히 무대에 서서 자신의 내면에서 둥글리고 다듬고 색을 입힌 대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헬레나는 훌륭한 전달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연극에 감동을 받는다. 

그런 헬레나가 전화를 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냥 얼굴 한 번 보자고. 그 어떤 감정이나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느낌 없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그는 그녀를 만났다. 그 때였을까. 가족을 챙기고 신경 쓰고 단단하게 붙잡아 주느라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연극을 그만 두었다는 사실과 이후 조금씩 쌓여 온 삶의 무게가 그를 주저앉힌 것은. 장 피에르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었을까.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스틸 이미지.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스틸 이미지.

크리스마스 이브의 가족파티에서 그만 장 피에르의 마음 한구석이 예리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헬레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가뜩이나 심란해져 있는 상태였을 텐데, 헬레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떠나온 연극무대가 자연히 연상되었을 텐데, 가족들을 위해 그가 준비한 여행을 마뜩치 않아 하고 (물론 그에게 고마워하지만) 잔소리쟁이쯤으로 치부하는 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그의 마음엔 아마도 작은 구멍이 뚫려버렸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리는 것은 커다란 구멍이 아니다. 간신이 버텨 오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 문득 생겨버린 작은 구멍이 팡 터져 버리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흔들리지 말아요.
자신의 눈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을 깊은 곳으로 인도해요.
낯선 이들에게 힘을 부어 주세요.
자신만의 색깔을 내요.
자신답게 살아요.“

장 피에르가 본 헬레나의 무대, 장 피에르가 들은 헬레나의 대사는 그의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리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써주고 챙기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자신이 그런 마음과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가 받고 싶은 아니, 받아야 하는 것들이기에 누군가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둘러보고 나눠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이후, 남은 자들은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과 책임과 무게를 비로소 느낀다. 그 상실감은 그들의 몫이고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영화 속에서 쥘리에트가 완성한 단편집의 제목이 바로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인데 이 제목이 장 피에르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안나 가발다의 단편집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단편의 내용을 한 가족으로 확대해서 잘 짜냈다. 좋은 각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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