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 원짜리 상품권에 담긴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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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원짜리 상품권에 담긴 온기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에 청취자가 보내온 뜻밖의 선물
  • 민인경 극동방송 PD
  • 승인 2020.12.29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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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나다운 삶, 나다운 글쓰기‘ 주제로 쓴 글을 추려 싣는다. <편집자 주>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민인경 극동방송 PD]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해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로 이름을 날리던 무렵,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아버지를 따라 엑세터라는 영국의 작은 도시로 가게 됐다. “I'm from Korea” 라고 소개하면 “Ko… What?" 이라고 되묻던 순수한 학생들이 있는 공립 고등학교. 전교에 동양인이 나와 내 동생, 단 두 명뿐인 곳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다음 수업을 찾아가는 것도, 간신히 찾아간 그 교실에서 선생님의 말을 따라가는 것도, 모든 것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튜터 선생님의 배려로 나를 도와주는 헬퍼 친구들이 붙여졌지만, 나를 빙 둘러싼 친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친구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친구들이 일어나 어디론가 가면 같이 움직였다. 내 옆에 누군가가 항상 있었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그 때, 나에게 작은 쪽지가 날아왔다. 같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담이라는 남학생이었다. “Are You OK?” 단 세 단어뿐이었지만, 그 쪽지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위한 그의 배려이자 격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에서 타인에게 받은 첫 따뜻함이었다. 세 단어로 시작한 쪽지는 점점 글의 양이 늘어나 거의 펜팔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 편지에 “Do you wanna go out with me?”라고 적혀있었다. 그게 우리나라 말로 소위 ‘나랑 사귈래?’라는 표현이란 걸 몰랐던 나는 “그래! 언제 나갈래?”라고 대답했고, 어쩐지 많이 웃던 아담은 “이번 주말에”라고 답해줬다. 데이트인지도 모르고 나선 그날 저녁, 길거리에는 세계적으로 1위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던 제임스 블런트(James Blunt)의 <You're Beautiful>이 흐르고 있었다.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그렇게 일 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진학해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일 년 만에 수능을 볼 자신이 없어서 고등학교 1학년으로 편입했다. 

서울깍쟁이들, 그것도 학구열이 높다고 소문난 목동의 한 여고에서 나는 또 한 번 이방인이 될 각오를 해야 했다. 내가 한 살이 많다는 것도, 영국에서 살다 왔다는 것도 굳이 밝히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점이 드러나는 순간, 영영 타인으로 분류되어 그들과 영원히 섞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친구 중 한 명이 내 학생증을 본 것이다. 모두 ‘90’으로 시작하는 학생증 사이에서 내 것만 ‘89’로 시작하고 있었다. “뭐야! 너 89였어?”라는 친구들의 물음에, 나는 ‘드디어 터질 게 터졌구나’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러나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뭐야, 언니였네. 근데 난 그냥 언니라고 안 부를래.”

호들갑을 떨 법도 하고, 그동안 왜 숨겼냐며 추궁할 법도 한데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날 대해줬다. 가끔 매점에 갈 때는 “언니~” 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그 별것 아닌 장난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됐다. 그리고 별일 아니게 만들어 주는 그 무던함이 참 고마웠다. 한 살 적었지만 나보다 큰 그릇이었고, 위축된 전학생을 배제하지 않는 어른이었다. 내가 또다시 이방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나는 인생에서 두 번째 온기를 느꼈다.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PD가 꿈이었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든 방송부 선배가 멋있어 보였고, 그 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전파의 힘을 쥔 PD가 멋져 보였다. 그렇게 나는 이 엄청난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오랫동안 꿈이었다는 이유로 언론고시 외길을 판 끝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직업을 갖게 됐다. 그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많이 볼까”를 고민하다 입사 후에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1020을 타깃으로, ‘보이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청취자 중에 ‘평범한 아빠’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이 있다. 5살 8살, 9살짜리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닉네임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빠인 그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한 번은 같은 아파트에서, 또 한 번은 막내 어린이집에서 확진자가 나왔단다. 두 번이나 카페 문을 닫고 자가격리에 들어가야 했다.

이분이 우리 방송을 듣고 연락을 주셨다. 자신의 청년 시절이 생각났다고 했다. 자신이 이렇게 힘든 상황이지만,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응원과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며 프로그램에 후원의 뜻을 밝혀왔다. 일주일에 5000원 상당의 편의점 상품권을 제공하겠다는 것. 전국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대한 후원금으로는 다소 적은 금액일지 몰라도, 내가 받아 본 제안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 분의 깊은 마음이 전해지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숙제, 그 답의 실마리가 보였다.

각박한 시기일수록 나의 작은 온기를 주변에 나눌 수 있는 용기. 소외된 이방인에게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여유. 나보다 작은 그릇을 포용하고 넉넉하게 품는 마음.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따뜻함을 전하는 게 바로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방송의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힘들었던 시간을 Brilliant하게, 찬란하게 만들어 준 건 언제나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이었다. 그러기에 두렵지만 세 번째, 네 번째의 온기를 찾아갈 이 여정이 기다려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찬란해지길 바란다. 요즘도 가끔, 내가 있는 이곳이 춥다고 느껴질 때마다 아담과 함께 거리에서 들었던 제임스 블런트의 노래를 생각한다.

My life is brilliant, My love is pure
I saw an angel, Of that I'm 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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