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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타협 없는 좀비영화, 양분된 현실 세계 반영

지난 13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2' 포스터.
지난해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2' 포스터.

[PD저널=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좀비는 악, 인간은 선으로 딱 갈라놓고 서로를 죽이는 짓만 한다. 대화나 설득, 타협은 없다. 좀비 영화를 보면 이분법이나 진영논리로 양분된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그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 상부상조하는 쪽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현실은 힘이 정의이고 진리라는 식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SNS가 대중화되어 모두가 메시지를 생산‧유통하는 시대가 되면서 자기와 다르면 금방 증오하고 대립하는 현상이 보편화되는 것 같다. 좀비 영화 속의 폭력과 살육이, 현실사회에선 다른 쪽 진영에 대한 공격과 명예훼손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좀비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 아이티 민간신앙인 부두교 전설에서 유래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게임 등에서 바이러스 감염 등의 원인으로 주로 등장한다. 영화 속의 좀비는 대부분 악마와 같은 존재로 대량 학살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좀비는 갑자기 대거 등장해 인간을 잡아먹으려 공격하기 때문에 불문곡직하고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인간의 모습이기는 한데 인간을 해치는 흉측한 괴물이다. 좀비 일부는 인간과 공존이 가능하다는 부분적인 평화 공존의 가능성은 좀비와 인간의 관계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총체적으로 적대적이거나 상대를 깡그리 제거하는 것을 전제로 한, 집단학살을 전제로 한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영화 속에서 대량 학살되는 좀비의 모습을 보면 인간이 지닌 대량 학살의 본능이 뿌리 깊다는 생각을 한다. 활극영화일 경우 집단학살의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60~70년대에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인디언이 그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인디언은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해 와 수천 년 동안 생활해온 정든 터전을 강탈당하거나 집단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 역사적 피해자였다. 그런데 미국 서부활극 영화에서 인디언들은 대부분 선량한 백인을 공격하거나 살해하는 악역으로 나오고 정의의 편인 백인들이 복수하면서 인디언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2차 대전 이후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는 이른바 인해전술을 펴는 중공군이, 그리고 월남전의 경우 베트콩이 대량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좀비가 대중오락의 대상이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로 여겨지는데 2차 대전 이전의 수많은 전쟁은 대량학살이 자행된 끔찍한 살육전이 대부분이었다. 각종 무기가 개발된 것도 대량학살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오늘날은 핵무기나 수소폭탄 등이 대표적이다. 2차 대전이후 큰 전쟁은 한국전쟁, 월남전, 중동전 등이 손꼽히는데 이들 전쟁에서도 대량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다. 대향학살은 그 원인과 결과를 살펴야 하지만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장 잔인하고 반윤리적인 살상행위에 속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전쟁을 막아야 하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지만 전쟁이 날 경우 인간이 죽고 다치는 그런 전쟁이 아닌 쪽으로 해야 한다는 발상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와 같은 대중오락물에서 돈벌이를 더 많이 하기 위한 목적으로 좀비가 대량학살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영화 '살아있다' 스틸컷
영화 '살아있다' 스틸컷

우리 사회나 미국 등을 볼 때 정치권이 양분되고 유권자들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편이 옳다는 태도만을 고집한다. 예를 들어 현실 정치나 사회적 의사표출 과정을 보면 총체적인 극한의 적대감을 보이면서 언제나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 상대방의 발언이 있을 경우 어느 한 부분 또는 단어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적대시하거나 맹렬히 비판한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는 대선 전을 마치 전쟁을 치르는 듯한 극한적인 적대감을 표시하거나 지지자들도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 속의 그런 현상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방영되는 안방극장의 드라마도 인간의 사악하고 기만적이며 파괴적인 좀비 등장의 세계와 같은 그런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안타깝다.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보편화되면서 좀비를 대하는 듯한 적대적인 관계가 사회 속에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진영논리, 정파성에 갇히면서 내로남불이 난무하고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적개심을 품는다. 대화하고 소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한다는 미덕은 실종됐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상대 진영은 악으로 규정되어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종교적인 논란을 빌미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묻지마 살인이나 테러가 그치지 않는다.  무인기 폭격의 경우처럼 어린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다. 이런 모습은 개인이나 집단, 국가간의 불통과 비타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사소통의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오늘날 남녀노소의 의사소통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은 트위터는 한번에 140자의 짧은 문장을 메시지로 만들게 되어 있다. 단순한 일이라면 이런 분량이 충분하겠지만 복잡다단한 세상을 설명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짧고 명쾌한 메시지가 사이버 공간에서 환영받으면서 단순논리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심해지면서 사회적 갈등과 대치는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을 표현하는 문장은 주어+동사와 같은 단문 형식으로는 부적절하고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붙여서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는데 매우 타당한 지적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인터넷 속 메시지에서 상대방을 표현할 때 보면 단어 하나, 그것도 독하기 짝이 없는 단어,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대세다. 이는 인간을 단세포 동물로 여기는 저급한 인식에서 나오는 상황 인식 태도라 하겠다. 하나의 현상에는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뒤섞여 있고 인간의 언어라는 것도 사회구성원 모두가 사용하는 표현수단이지만 개개인이 사용하는 의미가 동일할 수 없고 전달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남에 대해 표현하고 공개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부 신문, 방송사들이 독설가 비슷한 사회평론가들의 페이스북 글을 퍼 나르기에 바쁜 한심한 짓을 하면서 사회가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다. 민주주의 전당인 국회에서도 여야는 거의 죽기살기식으로 대립힌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선되면 우선 국민 전체의 머슴으로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자기지지 세력을 보듬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걱정이다.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모습이 일상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런 모습을 ‘좀비문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속성은 선과 악처럼 상반된 자질이 뒤섞여 있는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신비스러운 존재다. 어느 한 측면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좀비문화’와 대비되는 상호존중과 소통, 조정, 화해, 공존, 상호봉사와 같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문화가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더욱더 많이 등장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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