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캐릭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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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PD저널=박재철 CBS PD] 우리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야기에 대한 선호와 애정은 멈추지 않는다. 손톱처럼 깎아도 깎아도 다시 자라난다. 밤새 이야기를 갈구하는 어린아이의 채근에서 자유로운 부모가 얼마나 될까.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라의 숙명은 윗세대 어느 누구나의 숙명이다. 보존과 전승, 흥미와 교훈, 몰입과 쾌감을 생각할 때 이야기는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인물(Character)이다. 전형성을 띤 인물이 특정한 국면(Circumstance)에 놓이고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Choice)을 하기 시작할 때, 멈춰선 육중한 기차가 제 바퀴를 서서히 회전시키며 나가듯이 그렇게 이야기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어 단어 C로 시작하는 이 세 개의 단어들이 그 모양처럼 서로에게 고리를 걸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로미오란 인물은 앙숙 집안의 줄리엣을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은 결국 로미오를 비극적인 선택으로 이끈다. 만약 유사 자살을 한 줄리엣 앞에서 로미오가 자신의 절망과 격정을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는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 이야기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출생부터가 비극적인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어떠한가. 친인척 간의 전쟁 후 죽은 오빠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지 말지, 갈등 상황에 직면한다. 그 혼란의 이면에는 자연법과 실정법의 충돌이 자리잡고 있다. 호두껍질처럼 두꺼운 번뇌를 강한 의지력으로 깨고 그녀는 실존적인 선택을 한다.

<광장>의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든 하나에 속해야 하는 분단체제 현실에 놓여있다. “너는 어느 편이냐?”는 강한 추궁을 그는 끝내 견디지 못했다. 전후시대 이념의 중력은 그의 무릎을 꿇게 할 정도로 거대했고,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그는 제3의 선택을 함으로써 이 이야기에 상징성을 덧입혔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올드보이'
2003년 개봉한 영화 '올드보이'

그런가 하면, 비루하고 허세로 뭉친 오대수는 캐릭터의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오랜 감금 때문이다. 설명도 납득도 안 되는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복수는 그를 다른 이로 바꾼다. 흩어진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올드 보이> 오대수는 진실에 직면한다. 그 진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처참하다. 극적인 진실만큼이나 그 진실에 응답하는 그의 선택 역시 극단적이다.
 
로미오와 안티고네, 그리고 이명준과 오대수. 인물은 독특할수록, 상황은 심각할수록, 그리고 선택은 어려울수록 이야기는 그 주위에 듣는 이를 더욱 바싹 둘러앉힌다. 

완성도 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이야기는 희곡이나 시나리오 혹은 소설일 것이다. 이야기의 창작은 인물 구축으로 그 첫걸음을 뗀다. 그리고 캐릭터에 시대적 특수성이나 인간적 보편성이 응축돼 가미되면 해석의 지평은 훨씬 넓어진다. 

이 점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시대상의 맥을 짚거나 인간 본질의 속살을 들어다보는 데에 캐릭터 탐구는 유용한 도구가 돼줄 수 있다. 내가 그 인물로 잠시 빙의되어 한계 상황에서 나의 대응방식과 선택 논리를 구상해보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유사체험 해보는 것,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향유는 능동성을 띤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어쩌면 리스크(risk) 없는 리워드(reward)를 바라는 우리의 은밀한 마음의 투영이기도 하다. 황홀한 소리로 듣는 이를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는 세이렌의 노래를 제 몸을 배에 결박한 채 기어이 감상하고야 마는 오디세우스의 욕망처럼 말이다.

인물 탐색은 다른 한편으로 작가의 성향이나 지향을 추론해볼 수 있는 실마리가 돼준다. 작가는 이 캐릭터를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을까. 이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혹여 자신의 결핍과 좌절을 아니면 욕망과 취향을 굴절된 형태로 이 캐릭터에 슬쩍 끼워놓은 것은 아닐까. 작가는 대체로 부인하지만 주인공을 그의 페르소나로 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창작자와 캐릭터의 상관관계는 작품의 행간을 읽는 또 다른 독법을 제공한다.
 
칩거와 단절의 시간이 지속되는 요즘, 이야기 속 매력적인 인물들을 발굴 혹은 발견하는 즐거움은 소소하지만 흥미롭다. 이런 놀이가 쌓이고 쌓여, 어느새 일의 영역을 넘어와 언젠가 예기치 않은 흥을 돋울 날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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