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간양록', 이분법에 갇힌 한일관계 해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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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입사 2년째에 덜컥 맡은 '간양록', 일본에서 '성리학 아버지'로 추앙받는 수은 강항 선생 조명
코로나19로 일본 촬영 불가, 첫 경험한 드라마 연출 등 제작 과정 험난

지난 10일 광주MBC 설 특집 다큐드라마로 방송된 '간양록'
지난 10일 방송된 광주MBC 설 특집 다큐드라마 '간양록'

[PD저널=한가름 광주MBC PD] 입사 3차인 지난해 부서회의에서 다큐멘터리 메인 연출로 배정을 받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입사한 지 아직 2년밖에 안 됐는데? 심지어 일반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다큐드라마’란다.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다큐드라마라니. 게다가 UHD로 제작해야 된다고 들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선배들은 내게 말했다. 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내 인생 첫 다큐, 광주MBC UHD다큐드라마 <간양록>은 시작했다.

 『간양록』의 저자, 수은 강항 선생은 영광 출신의 조선 선비로, 일본에서는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80년 MBC에서 방영한 <간양록> 드라마를 본 중년층과 노년층에게는 가수 조용필씨가 부른 ‘간양록’이 꽤나 유명하다. 하지만 나의 학창시절 교과서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인물. 심지어 나는 대학에서 역사문화학과를 졸업했는데도 처음 들어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생기면서부터 ‘강항’의 이름은 교과서에 딱 한 줄로 등장한다. 

 강항은 정유재란 당시 의병들을 모아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려다 왜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일본에 끌려가 2년 8개월을 보냈다. 그는 적진에서도 우국충절의 마음으로 몰래 왜국의 동정을 낱낱이 기록해 일종의 비밀보고서인 ‘적중봉소’를 조선으로 3차례나 보냈다. 교토로 압송되었을 때는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일본에 유학을 전했다. 당시 일본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정치적 전환기로, 강항이 전파한 주자학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닦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부하다 보니 강항의 일대기만 쭉 풀어도 몇 부작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기존 다큐멘터리와 차별점을 두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이 어렵고 지루하다 생각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볼까? 그리고 왜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 강항과 간양록을 다시 봐야 할까? 처음으로 혼자 메인 연출을 맡으면서 기획 단계부터 가장 고민한 부분이다.

일본 오즈시 강항 위령제, 교토 코무덤 위령제. 두 개의 위령제를 발견한 것은 운이 좋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잘 모르는 강항을(이순신 장군에 비해서 덜 유명한 것은 사실이니까) 일본에서는 그의 위령제까지 지낸다?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게다가 취재과정에서 간양록 필사본이 강항의 친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운 좋게 새로운 사실도 발견한 것이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면 기존 역사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느낌으로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일 방송된 광주MBC 설 특집 다큐드라마 '간양록'
지난 10일 방송된 광주MBC 설 특집 다큐드라마 '간양록'

하지만 처음 포부와 달리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은 어려웠다. 작년 한 해 코로나19로 수십 명이 모여야 하는 드라마 촬영 자체가 불가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현지에 들어가려고 하니, 촬영 당시는 입국 금지까지 나오던 때라 현지 촬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일본 촬영은 현지에 살고 있는 감독님을 섭외했다. 매일 감독님과 2시간 이상씩 통화를 하며 다큐가 무엇인지 배웠고, 무엇을 이야기할지 긴밀하게 얘기했다. 아마 일본 현지 감독님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현지 촬영은 어려웠을 것이다.

드라마 촬영은 코로나19 상황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모임 제한이 완화되었을 때 긴박하게 촬영했다. 드라마 촬영 자체가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수십 명의 스태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사실 첫 드라마 연출이라 많이 미숙했다. 현장에서는 괜찮다 생각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편집할 때 후회한 적도 많았다. 왜 이 장면은 촬영을 안했지? 왜 이 컷을 이렇게 찍게 연출했지? 연기가 어색한데 한 번만 더할걸! 왜 안했지? 정말 드라마 촬영은 촬영 전부터 꼼꼼하게 모든 것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다큐드라마를 연출하며 PD는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하나의 프로그램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열정이 들어간다. 여기에 협찬처의 큰 제작비까지 지원된다. 돈으로는 절대 치환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쓰는 사람. 그 사람이 PD였다. 그렇기에 처음 다큐 연출을 하며 두려웠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만들면 이 사람들의 시간, 노력, 비용이 허무하게 날아가는 꼴이 될까봐. 방송 당일 내가 이 이상으로 더 잘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고 뽑았던 파일을 TV로 다시 보면서 후회했다. 이 컷을 바꿔볼걸. 이 구성을 이렇게 해볼걸. 첫 다큐 연출은 내게 큰 고민을 남긴 경험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지역사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3억 원이라는 큰 제작비를 신입에게 맡겨주어 이를 운용하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다큐에 드라마 타이즈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무사히 송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선배들의 도움이 컸다. 기획 단계부터 무엇을 어떻게 고민하면 좋을지 옆에서 계속 질문을 던져주는 선배도 있었고, 구성안을 어떻게 치밀하게 쓰는지 알려주는 선배도 있었다. 촬영 내내 방향성을 체크하는 선배도 있었다. 무려 10여 차례나 시사회를 진행하며 한 컷 한 컷마다 왜 썼는지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묻고 알려주는 데스크도 있었다. 후배PD의 입봉작을 위해 뒤에서 몰래 지원사격한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UHD다큐드라마 <간양록>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다큐란 무엇인가. 처음으로 한 시간 분량(본방송 60분, 확장판 70분)의 다큐 한 편을 끝냈지만, 사실 여전히 다큐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첫 메인 연출을 하며 느낀 다큐는 ‘현재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 기록을 보며 한 시대를 평가하듯, 이 다큐 기록을 통해 미래세대에게 질문을 남기는 것.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남기는 기록. 

 UHD다큐드라마 <간양록>은 단순히 우리 지역 영광에 강항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길 바란다. 친일, 혹은 반일. 두 가지의 프레임 안에서만 얘기하는 한일 관계. 앞으로 젊은 세대는 무작정 배척하는 한일관계가 아닌, 새로운 프레임을 찾을 수 있길 원했다. <간양록> 다큐드라마를 통해 미래 한일관계의 해법까지 찾아가는 마중물이 되길 바라며 다큐의 첫 기록을 마쳤다.

 다큐를 마치고 나니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 짧은 분량 탓에 축소되고 더 풀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은 강항 선생과 간양록을 틈틈이 더 공부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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