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경고음, 아직도 '백색소음'으로 들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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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경고음, 아직도 '백색소음'으로 들리나요
[비필독도서 41] '시간과 물에 대하여'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1.03.05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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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3일 전남 구례군 산수유꽃군락지에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한 모습. (사진=구례군청 제공)ⓒ뉴시스
지난 2월 23일 전남 구례군 산수유꽃군락지에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한 모습. (사진=구례군청 제공)ⓒ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이것 봐, 나무 끝이 파랗게 돋아 났어.” 아직 채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날, 남산을 함께 걸어 내려오던 엄마가 개나리나무 끝을 가리켰다. “봄이 왔다 착각한 모양이다. 이러다 얼어 죽는데.” 엄마는 나무가 온 힘으로 밀어낸 새싹 끝을 더듬거렸다.

산골에서 태어나 수십 년간 같은 풍경을 맞이한 엄마는 때이른 봄맞이의 결말을 안다. 손끝이 안타까웠다. 때를 모르는 식물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한숨 섞인 말들이 불안하게 피어 올랐다.

수십 년간 비슷했던 날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산림청에선 최근, 식목일을 3월로 앞당기는 방안에 대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3월만 되어도 따뜻한 날들이 이어져서, 4월이면 나무 심기엔 너무 더워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나무 심는 일이 생소해지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나무 끝부터 찾아오던 봄이 때를 잊어버리면, 이제 봄은 어떻게 알아채야 할지 걱정스럽다. 기후 위기는 계절처럼 눈 앞에 왔다.

아이슬란드 작가이자 환경운동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도 비슷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2019년 아이슬란드에서 사라진 최초의 빙하에 대한 추도문을 썼던 그는, 영원하리라 믿었던 빙하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덧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쓴 에세이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는 기후 위기로 인해, 보지 못한 풍경을 상상하는 일이 곧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곳곳에 배어있다. 

이 책은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세대에서 세대로 기억을 덧대어보려는 시도다. 부모의 기억, 문학 작품, 역사 문헌 속 풍경을 자식의 세대에 잇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다. 추상적인 기후 위기라는 개념이,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풍경이 사라질 수 있다는 구체적인 두려움과 맞닿는다. 과학적인 정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대중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저자는 이야기를 택했다.

수십만 년이 걸리던 자연의 변화는 이제 고작 100년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해수가 산성화되고, 극지방의 빙하가 사라지는 일들이 짧은 시간에 걸쳐 일어났다. 책이 지적하는 많은 경고 신호들은 이미 과학자들이 수차례 언급했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신호들 앞에서 사람들이 생각보다 무덤덤하다는 데 있다. 기후 위기를 논하는 전문가들마저도 집단적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슬란드 작가이자 환경운동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이 쓴 '시간과 물에 대하여'
아이슬란드 작가이자 환경운동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이 쓴 '시간과 물에 대하여'

그는 우리가 급격한 변화를 설명할 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 변화들은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을 뛰어넘고 우리가 현실의 나침반으로 삼는 대부분의 언어와 은유를 초과한다.” 아무리 정확한 정보라도, 기후 위기라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백색 소음일 뿐이다.

저자는 19세기 아이슬란드의 혁명가 예르겐 예르겐센의 사례를 든다. 그가 이야기한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당대의 시민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일렀다. 저자의 말마따나 새로운 현상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게 내버려두고, 태도를 바꾸기를 기다리기엔 남은 시간이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해는 체념의 다른 말에 불과해진다.

저자는 기억과 기억을 이으며 ‘시간선’을 건너 뛰길 요청한다. 우리가 아닌 미래 세대가 살아갈 시간으로 건너 뛰어야만 재난 앞에 냉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정치적 미숙함을 지적하는 어른이기보다, 절박하게 온전한 미래를 요구하는 어린이의 시선이 필요한 때다.

저자는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예찬하던 자연의 소멸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과거가 좋았다는 태도를 보이진 않는다. 대신 과학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믿는다. 예컨대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삶의 태도만큼이나,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고 나아가 없앨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길 요청한다. 핵무기 개발에 들일 자원을 기후 위기 해결을 위해 쓴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본다. 그러려면, 정치적 선택이 필요하다.

경향신문의 신년 특집 기사 <45세가 된 준혁씨의 2050년>에서 예상 하듯, 이대로라면 청소년들은 장년이 될 때까지 거주 불능의 지구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위기를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그들의 목소리를 기입할 방법은 없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침묵을 요구받는다. 사법적 조치들로 정치 과정에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이 역시 어른들의 손에 그 결과가 달려있다. 중첩된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절반의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문제는 다시 한 번, 정치다. 저자의 말마따나 수십 년 뒤에 피해를 입힐 것이 뻔한 행위들을 민주주의 체제가 제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오류다. 바로잡을 시간은 많지 않다. ‘수치스러운 조상’이 되지 말자는 저자의 호소에 제대로 부응하기에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미래를 물려줄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 필요하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부터 지구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유엔의 기후 위기에 대한 보고서의 결론을 진지하게 생각할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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