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백화점’의 균열...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방송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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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백화점’의 균열...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방송사들
방송작가·MD 등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성 인정 결정 잇따라
고용노동부 27일부터 지상파 3사 근로감독 돌입
"방송사 시대적 흐름 따라야...노동자 흔적 지우는 방식 안 통할 것"
"변화 움직임 단속적으로 이뤄져 한계...지속적 논의 장 마련해야" 
  • 손지인 김승혁 기자
  • 승인 2021.04.30 16: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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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9일 상암 MBC 앞에서 열린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구제 및 근로자성 인정 촉구' 기자회견. ⓒPD저널
지난 3월 19일 상암 MBC 앞에서 열린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구제 및 근로자성 인정 촉구' 기자회견. ⓒPD저널

[PD저널=손지인 김승혁 기자]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거센 요구에 직면했다. 정부는 근로감독과 재허가 조건 등으로 방송사를 압박하고 있고, 방송사에서 프리랜서·파견직으로 일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결정도 연달아 나오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견고했던 방송사의 고용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MBC <뉴스투데이> 방송작가가 제기한 부당해고 구제신청에서 방송작가 근로자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지난 26일 고용노동부는 청주방송 특별근로감독 결과, 프리랜서 21명 중 12명을 근로자로 판단했다. 곧바로 고용노동부는 지난 27일부터 지상파 3사 근로감독에 들어간 상태다.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는 1991년 외주제작 의무편성제도 도입으로 촉발됐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가속화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2020년 방송산업 종사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방송산업 종사자 가운데 비정규직은 10.9%로 집계됐지만, 실제 30~40%에 이른다는 조사도 적지 않다.  2020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진행한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실태조사’에선 한 공공부문 방송사는 전체 인력의 40% 이상이 비정규직인 것으로 드러났다. 통계청 MDIS 지역별고용조사(2020)에 따르면 방송사 프리랜서 비율은 2008년 15.2%에서 40.9%(2020년)로 늘었으며, 단시간 노동자는 동일 기간에 13.4%에서 24.5%로 증가했다.

실제 구인구직사이트에서 미디어 부문의 채용공고를 보면 40%가량이 '비정규직'이다.  

29일(오후 7시 10분 기준) ‘잡코리아’에 올라온 PD·영상·아나운서·작가 등 직종의 채용정보 3584건 중에서 '프리랜서·계약직·파견직‧인턴직' 고용형태는 1497건(41.8%)에 달했다. ‘사람인’도 미디어 직군 채용공고 2123건 중 절반가량(1003건)을 비정규직으로 뽑고 있었다. 

방송사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쓴 이유는 대부분의 직무에 걸쳐 프리랜서, 간접고용(파견‧도급), 기간제 등 다양한 고용형태가 보이기 때문이다. 각 부서, 팀별로 필요에 따라 인력을 채용하다보니 방송사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인력이, 어떤 형태로 일하고 있는지 파악조차 어렵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방송사는 특히 다른 공공기관, 민간기업의 고용형태보다 다층적, 이질적, 종합적인 고용형태를 갖고 있다”면서 “비정규직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프리랜서인데, 방송사 주요 제작과 지원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뉴스투데이> 작가들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들이 방송사의 지시를 받고 일하면서도 '프리랜서'라는 고용계약 때문에 법의 보호를 못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18년차 프리랜서 작가는 “프리랜서는 장단점이 있지만, 일을 하다보면 ‘프리랜서 작가는 우리 사람이 아니야’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근로지원금이나 코로나19 예술인 지원제도 등에서도 작가들은 철저하게 배제됐다. 서면계약서는 18년 동안 일하면서 5~6번 정도 쓴 게 다였다”라고 말했다.   

지난 27일 KBS 본관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를 비롯한 언론협업단체들이 '공영방송 KBS 드라마 제작현장 장시간노동 중단 및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난 27일 KBS 본관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 지부를 비롯한 언론협업단체들이 '공영방송 KBS 드라마 제작현장 장시간노동 중단 및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방송사의 '갑질'과 착취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지금까지 불공정 외주제작 거래 개선, 표준계약서 도입 등도 추진됐지만, 가시적인 효과는 미미하다.

2018년 지상파 방송사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 드라마제작사협회 등이 제작환경을 개선하자며 '4자협의체'를 꾸렸지만 논의에 진전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2019년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통해 감독급을 제외한 드라마 현장 스태프는 노동자성 인정받은 뒤에도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지난 27일 KBS 앞에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촉구 기자회견을 연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났는데도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한 데가 아직까지 단 한 군데도 없다. 여전히 용역 계약이나 턴키 계약(기획‧설계·조달·시공 등 프로젝트 전체를 포괄하는 계약 방식)을 체결한다. 외주 제작사는 아직도 구두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뤄진 지상파 3사 근로감독을 방송작가들이 예의주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한별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은 “근로감독에 들어간 이후 방송작가들 통해 제보를 받고 있는데, ‘방송작가에게 출퇴근을 시킨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며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방송작가들의 노동 실태는 근로감독관 인터뷰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방송사들은 난처한 기색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면 거센 비판이 예상되고,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수용하기에는 행정적 경제적 부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KBS 관계자는 “KBS가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유감"이라면서 "비정규직 현황 조사를 마치고 오는 하반기까지 비정규직 규모 및 구조 파악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방통위는 지난해 말 지상파 방송사들의 재허가를 의결하면서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를 4월말까지 제출하라는 등의 조건을 부가했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례가 나오면서 비정규직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방송작가뿐만 아니라 간접고용 등으로 계약을 맺었던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공론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은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비정규직 조직화에 들어갔고, 방송계 비정규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미디어노동공제회(가칭)’를 추진 중이다.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을 위해 방송사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성혁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중노위의 <뉴스투데이> 작가 ‘노동자성 인정’ 판정은 사측의 수용 여부를 떠나 전반적인 실태 파악과 함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안겨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면서 “공룡OTT의 등장 등으로 방송 노동시장의 급격한 확대와 그로 인한 착취구조의 심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는 개별 사례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해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기존에 개별 노동자들이 회사와 싸워서 승소하는 사례가 나왔을 때 회사에선 노동자성을 드러내는 징표를 지우는 등의 작업을 했다”며 “이제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방송사들이 구조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방송 제작에 불평등한 구조를 해결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어떤 과정과 수단으로 해결할 것인지로 들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맞다”고 했다. 이어 “문제는 이런 변화의 움직임이 자꾸 단속적으로 이뤄지는 것인데, 논의가 진행되다 끊어지거나 외부의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며 “상호 신뢰 속에 일정한 목표에 합의하고, 지속적인 논의의 장을 만든다면 타협점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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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진 2021-05-23 02:46:58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방송가는 해당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세부적인 문제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인 공정 외주거래, 표준근로계약서 작성부터 차근차근 바로 잡아나가며 공평한 계약 아래 다양한 방송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가 차원의 철저한 감사를 통해 전반적인 방송가 근로 환경 개선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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