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엄군의 참회록..."가해자들의 용기있는 고백 더 나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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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5‧18 41주년 특집 다큐 '나는 계엄군이었다' 계엄군 최병문씨 고백 담아
김무성 PD "트라우마 겪는 계엄군 많아...신군부와 부대원 분리작업 필요"

ⓒKBS
KBS가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지난 18일 방송한 '나는 계엄군이었다' 예고화면. ⓒKBS

[PD저널=이재형 기자] 18일 방송된 5‧18 41주년 특집 다큐멘리 KBS <나는 계엄군이었다>는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한 계엄군의 고백이자 참회록이다.  

당시 11공수특전여단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최병문씨는 카메라 앞에서 “언젠가는 계기가 있으면 꼭 한번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면서 “처음에는 망설였는데,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상 말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결심했다”고 공개 증언에 나선 이유를 말했다. 

최씨는 5‧18 당시 화순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가 버스에 타고 있는 민간인을 집단 사살한 주남마을 집단 학살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41년 만에 광주를 찾은 최병문씨는 주남마을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앞에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왜 하필 내가 그 당시에 그 부대에 있었을까. 내가 죽고 나야 이 감정은 없어지겠지”라고 자책하는 최씨를 주남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홍금숙 씨는 “이제는 마음을 좀 편히 내려놓으라”고 위로했다.  

<나는 계엄군이었다>를 연출한 김무성 KBS광주방송총국 PD는 통화에서 “전국의 계엄군 출신 7~8분을 추적했는데, 많은 분들이 피해자와는 다른 트라우마를 보였다”며 “어떤 분들은 피해자들에게 미안해서 힘들다는 말도 못하겠다고 했다. 계엄군의 이야기를 광주에서 먼저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5‧18단체에서는 화해와 화합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가해자들은 용서를 빈 적이 없고 현장에 투입된 계엄군들은 트라우마를 겪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면서 “명령을 내렸던 신군부와 현장의 군인을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주남마을 버스 집단총격 학살 사건으로 최소 17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5명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최병문씨도 주남마을 버스 총격 이후 현장에서 의자 밑에 숨어 있던 한 여고생을 발견했지만, 이후의 생사는 알지 못하고 있다.  

KBS가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지난 18일 방송한 '나는 계엄군이었다' 예고화면.
KBS가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지난 18일 방송한 '나는 계엄군이었다' 예고화면.

김 PD는 “피해자의 기록만 있었다면 이제는 가해자의 기록이 나와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게 필요하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같은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의미가 있지 않나”라고 가해자 증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병문씨는 방송 말미에 “왜 나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말해도 좋은데 (당시 계엄군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다”며 “실종자들이 너무 많은데 (공수)부대원들은 알고 있으니까, 한마디만 좀 해주면 (좋겠다)”라고 호소했다.

정부가 5·18 관련 공식 행방불명자로 인정한 사람만 78명에 이른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최근 중간조사 결과 발표에서 계염군에 사살된 뒤 사라진 55구의 시신을 추적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무성 PD는 “방송이 나간 뒤 많은 가해자분들이 용기를 내서 고백을 했으면 좋겠다. 당시에 암매장 당한 피해자들이 많은데,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게 (당시 계엄군들이) 나섰으면 한다”며 “사죄하면 피해자들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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