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승려는 어떻게 혁명가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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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하지 말라' 계율 지키던 승려가 무장단체에 들어간 까닭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미얀마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가 넉 달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폐쇄되면서 미얀마 기자들도 거리로 나왔습니다. 한 싸인(필명) 기자도 그중 한 명입니다. 미얀마의 봄이 올 때까지 한 싸인 기자가 전하는 미얀마 현지 소식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3월 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승려들이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만달레이=AP)ⓒ뉴시스
지난 3월 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승려들이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만달레이=AP)ⓒ뉴시스

[PD저널=한 싸인 미얀마 해직기자] 때는 개와 늑대의 시간. 도나 산맥에서 보면 해는 서쪽 지평선의 회색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질 무렵이다. 도나 산맥은 미얀마의 동쪽 국경에  위치해 수천년 세월 속에 자연이 만들어준 벽을 형성하고 카렌주와 몬주를 관통하며 북에서 남으로 뻗쳐있다. 

독일산 M416소총을 들고 있는 혁명가 조지마이클이 숲이 우거진 언덕 꼭대기에서 서쪽 지평선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을 가진 33살 마이클은 얼마 전에 이곳 캠프에 도착했다. 이 캠프는 카렌주 짜잉세익찌 지역에서 유명한 도나 산맥에 있다. 울창한 숲이 있고 강이 많은 지역이므로 무장단체 혁명가들에게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은 이 지역에 도착한지 며칠밖에 안 됐다. 

그는 자주 서쪽을 바라본다. 100일 전에 마이클은 지금처럼 소총을 든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불교 승려였고 법명은 케이싸라라는 스님이었다. 그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약 425㎞ 떨어진 미얀마 옛 수도 양곤의 어느 사찰에서 약 13년 정도 승려생활을 했었다. 지난 2월 1일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에 케이싸라 스님은 정치에 특별히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쿠데타 이후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하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군부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그냥 있지 못하고 결국 군부에 맞서 싸우게 됐다. 

“그 당시에 (쿠데타 초창기 가두시위가 있었을 때) 군부에 맞서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 현장에 나갔다”라고 스님이 말했다. 케이싸라 스님은 양곤 외곽 흘라인따야 타운십에 있는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두시위에 매일 참여했다. 시위대 맨 앞에 서다보니 어느 날부턴가 스님은 군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고 3월 13일에는 ‘흘라인따야 타운십 시위대를 이끈 리더’라는 국영신문 <먀와디>의 보도가 나왔다.

불법으로 정권을 뺏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로 낙인찍은 군부는 야밤에 시위대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집중적으로 찾아내서 강제 체포했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6월 1일까지 군부에 수감된 정치범은 4443명에 달한다.) 군부가 흘라인따야 타운십 시위대 리더라고 보도했을 때부터 스님은 사찰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했었다. 

미얀마 군부에 맞서 승려복을 벗고 무장시위에 결합한 케이싸라 스님.
미얀마 군부에 맞서 승려복을 벗고 무장시위에 결합한 케이싸라 스님.

지난 3월 14일부터 케이싸라 스님은 시위대 뒤쪽에서 시위대가 필요한 것들을 후방 지원했다. 시위 초기부터 흘라인따야 타운십의 시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투쟁적이고 열성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군부는 이 타운십에 무장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강경 진압했다. 어두침침한 차도에는 시민들의 피와 시체가 쌓였고 친와 가족을 잃은 절규와 도움을 호소하는 소리, 부상 입은 시위대 시민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시위대 후방에서 도움을 주신 케이싸라 스님의 휴대폰으로는 수많은 통화와 문자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부상으로 피 범벅이 된 시민들의 사진, 사망한 시민들의 사진 등이 붙어있는 통계자료들이었다. 3월 14일 벌어진 흘라인따야 타운십 내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 58명이 사망했다고 흘라인따야 타운십 종합병원 담당자가 확인해 주었다. 

“그날은 군부가 흘라인따야 타운십을 잔인하게 공격한 날이었어요. 저의 지인들도 그날 군경이 쏜 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라고 케이싸라 스님이 말했다. 

미얀마 사찰에서 13년 동안 수행만 하며 살아온 수도승이 무고한 시민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날이 갈수록 시체만 쌓여가는 현장을 보고 어찌 가만히 앉아 명상수행만을 할 수 있겠는가? (불교 수도승들은 사망한 시체를 보고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명칭을 부치고 명상수행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날 흘라인따야  타운십에선 2021년 군부 쿠데타 “대중 민주주의 운동 역사”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바고시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미얀마 시민들은 쿠데타 초창기 때는 민주주의를 위해 평화롭고 비폭력적으로 시위를 진행했으나 미얀마 군경의 잔인한 강경진압으로 인해 결국 시민들은 정당방위, 나아가 복수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도심에서 진행하고 있었던 시위대의 무력함에 절망하고 군부에 대적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국경 지역의 정글로 떠났다. 이 때 케이싸라 스님도 이 젊은이들과 동행했다. 

케이싸라 스님은 “나는 군부 독재에 맞서기 위해서는 총과 같은 무기를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수도승 신분으로 살아온 제가 군부에 맞서기 위해 살상 무기를 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비구가 꼭 지켜야 할 계율 중 하나임)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무기를 들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스님은 수도승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 결국 3월 20일에 환속(還俗)했다. 그리고 조지 마이클이라는 가명을 쓰고 혁명가가 됐다. 이때 카렌족 무장단체인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이 관리하는 카렌주 짜잉세익찌 지역의 정글 캠프에 들어왔다. 

7일(현지시간) 미얀마 카렌주 무트로 지역에서 카렌 민족해방군의 한 병사가 미얀마군 초소에서 발견한 박격포탄 무더기 옆에서 박격포탄을 들고 있다. 반군 고위 간부는 카렌족 게릴라가 미얀마 군부대 전초기지를 점령해 불태웠다고 밝혔다.(미얀마 무트로=AP)ⓒ뉴시스
지난 5월 7일(현지시간) 미얀마 카렌주 무트로 지역에서 카렌 민족해방군의 한 병사가 미얀마군 초소에서 발견한 박격포탄 무더기 옆에서 박격포탄을 들고 있다. (미얀마 무트로=AP)ⓒ뉴시스

양곤, 에야와디, 바고, 카렌주에 주로 거주하는 카렌족은 미얀마의 8개 주요 민족 중에 하나이다. 영국으로부터 해방된 뒤 군부의 통치를 50년간 받으면서 복잡한 정치적 위기에 휩싸인 미얀마의 소수민족들이 권리를 되찾기 위해 군부에 맞선 지는 벌써 72년(1949년부터 시작)이나 되었다.

카렌주 짜잉세익찌 지역을 포함한 미얀마 태국 국경을 폭넓게 단속하고 있는 카렌민족연합은 카렌족의 정치 지도부이며 1949년부터 무장을 했던 민족이기도 하다. 이 무장단체는 민간 정부가 집권한 2015년 10월에  민간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후 민간 정부와 정치적인 입장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왔는데 2021년 2월 1일 군부가 정권을 뺏으면서 그동안 논의해 왔던 내용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카렌민족연합은 군부에 대항한 미얀마 젊은이들이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하고 있다. 카렌민족연합에 따르면 지난 2달 동안 400번 이상 군부와 충돌이 일어났다. 

미얀마 군부의 공격과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청년들이 카렌민족연합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은 작년 대선 때 선출된 의원들로 창설된 민족연합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의 무장 단체 세력인 시민방위군(People’s Defense Force)의 신병이 될 것이다.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민족연합정부에서 내리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클은 지난 5월 15일에 기본 군사 훈련을 마쳤다. 수배자가 된 마이클은 양곤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시적으로 카렌민족연합의 자치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하고 최전선 캠프에 도착했다. 이 캠프는 지난 3월에 새로 만든 곳이다.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이클은 그의 고향인 양곤이 그리울 때 마다 서쪽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마이클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그에게 3형제가 있다. 가족 모두 금, 다이몬드 같은 보석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마이클이 막내다. 지금 숲속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혁명가의 길을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고 하다. 그는 “민주주의를 쟁취할 때까지 혁명가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을 때 조지 마이클이라는 가명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긴장된다고 했다.  

태양은 수평선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주변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해져 버렸다. 마이클처럼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도 동쪽에서 해가 뜨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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