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순, 기숙', 엄마는 왜 참전유공자 훈장을 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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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 기숙', 엄마는 왜 참전유공자 훈장을 숨겼을까
[제작기] 여성 참전용사 조명한 KBS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편견 때문에 한평생 비밀로 간직한 할머니...여군 차별은 사라졌나
  • 오예진 KBS춘천 PD
  • 승인 2021.06.08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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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방송된 KBS 현충일 특집 UHD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포스터.
지난 6일 방송된 KBS 현충일 특집 UHD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포스터.

[PD저널=오예진 KBS춘천 PD] 춘천여고에 학도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안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가끔 지하철역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여성 독립운동가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참전유공자 중에 여군이 있을 거라고는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춘천여고에 학도병이 있었다니. 춘천에서 학교를 나오고, 춘천에서 방송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게 부끄럽고 이상했다.

순간의 부채감에 기획안을 써냈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올 2월, 덜컥 제작에 돌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입사 1년 9개월 만에 5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입봉하게 되는 셈이었다. 부담감이 너무 커 밤마다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정중하게 제작을 거부할까 고민도 했다. 그런데 아흔에 가까운 연세이기에 6개월이 다르고 1년이 다를 거라는 한 선배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지금 이분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은 없을 거고, 내가 잘 못 만들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분명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순, 기숙 두 할머니의 71년 전 소녀시절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송연순 할머니는 여자의용군 2기생으로 당시 6사단에 소속되어 사단장 장도영의 비서로 일했던 여군이다. 연순 할머니는 딱 보면 군인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너무나도 귀엽고 웃음 많은 소녀 같은 할머니이다. 섭외 전화를 드린 날, 방송에 쭈글쭈글한 얼굴 나오는 게 싫다면서도 30분 동안 참전 경험담을 신나게 이야기하셨다. 사람을 좋아하는 게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리고 여든아홉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기억력이 또렷하시고 말씀을 잘하셨다.

기숙 할머니는 앞서 말했던 춘천여고 학도병으로 참전해 정훈부대에서 통일 노래를 불렀다. 연순 할머니와는 다르게 ‘군인’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다. 집안에 잡동사니라고는 없으며 시간에 맞춰 식사, 스트레칭 등의 하루 일과를 규칙적으로 실행하신다. 할머니 역시 섭외 전화를 처음 드렸을 때는 출연을 거절하셨지만, KBS ‘춘천’임을 강조하니 고향인 춘천이니 도와주어야 한다며 마음을 바꾸셨다. 할머니의 참전 경험담은 정말 영화 한 편 같았다. 압록강에서 중공군 습격을 피해 함께 참전한 동기생들도 잃고 겨우 살아 오셨기 때문이다.

지난 6일 방송된 KBS 현충일 특집 UHD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화면 갈무리.
지난 6일 방송된 KBS 현충일 특집 UHD 다큐멘터리 '연순, 기숙' 화면 갈무리.

두 할머니의 공통점은 한평생 자녀에게조차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유공자 문패며 훈장이며 모든 걸 농 속 깊이 묻어둔 기숙 할머니는 동기생의 제보로 국가유공자 지정이 된 그 순간에도 자녀에게 참전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자랑거리이자 무용담이었을 참전 경험이 할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할머니는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을 가족들과 나누는 것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된다고 생각했었고, 친구들을 잃었던 악몽 같았던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연순 할머니는 한마디로 여군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사셨다. 그 당시 ‘여군’이라고 하면 ‘기가 센’ 여자, ‘발랑 까진’ 여자라는 편견과 더불어 군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한다. 결혼할 때도 여군이라는 점 때문에 시댁 어른에 흠이 잡혔다고 하니 할머니가 입을 닫은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할머니가 찾아 나선 기억 속의 6사단 전우, 故 곽복순 할머니도 죽을 때까지 자녀들에게 여군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한 달 보름 전에 참전유공자라는 사실을 인정받으셨지만, 이미 의식을 잃으신 후였다.

방송이 무사히 송출된 후, 돌아가신 곽복순 할머니의 아드님께서 문자 메시지를 주셨다. 방송을 보며 새로운 엄마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고. 찍을 때는 울지 않았는데 방송 보며 많이 울었다고.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밤이라고. 아드님의 문자 메시지가 곧 이 다큐멘터리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곽복순 할머니처럼 평생 참전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신 여성 참전용사 분들께 작은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이제는 마음 편히 이야기해도 된다고. 당신께서 겪어온 그 세월이 궁금하다고. 우리는 할머니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요즘 자주 나오는 뉴스들을 살펴보면 의구심이 든다. 우리 사회는 정말 그분들이 여군이었다는 사실을 마음 편히 밝힐 수 있는 사회인가. 여군에 대한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남아 있지 않은 사회인가.

다큐는 끝났지만,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숙제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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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벗 2021-06-08 13:17:42
오랜만에 뜻깊은 프로그램이였습니다.
감사히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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