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아둘 가치가 있는 칼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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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45] '지지 않기 위해 쓴다'

[PD저널=오학준 SBS PD] 칼럼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정작 칼럼을 모은 책을 살 땐 망설인다. 칼럼은 정세에서 떼놓을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그 짜릿함이 휘발되기 마련인데, 책으로 묶어 나오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칼럼이 다루는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고, 그 문제를 대하는 필자의 자세가 낡지 않았을 때다. 새로이 건져낼 온당한 감각들이 있다면 꽂아둘 가치가 있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지지 않기 위해 쓴다>도 그렇다.

이 책에는 그가 198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40년 가까이 다양한 잡지에 기고했던 칼럼들, 체험 기사들이 6개의 주제 아래에 엮여 있다. 가난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이라 여기게 만드는 제도들, 자기 경영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강요하는 문화, 과학의 성과를 무력화시키는 종교적 믿음, 심화되는 빈부격차가 빚어내는 불의와 불평등의 문제, 계급과 여성을 교차시키는 페미니즘의 시선까지 그의 다양한 관심사가 한데 담겨 있다. <노동의 배신>, <긍정의 배신>, <희망의 배신>과 같은 베스트셀러의 ‘서문’ 역할을 하는 기사들을 읽는 재미도 있다.

저마다 다양한 매체에 실렸고 다양한 길이와 깊이를 가지지만, 이 글들 아래에 관통하는 비판의 시점이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가로 전향한 1970년대는 노조와 기업의 균형이 붕괴되고 중산층의 해체가 시작되던 시기다.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이들과 부동산과 자산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들이 양편에 생겨나고 사회복지보단 성공 보수를, 연대보다는 경쟁을 중시하는 시대,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 그의 글들을 하나로 엮는다.

그의 시선은 한편으론 ‘낡았다’. 여전히 계급과 착취가 사회 문제의 핵심적 모순임을 지적하는 그의 칼럼은, 독자에게 그의 무기가 새로운 시대의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세상도 낡은 채 기우뚱대며 굴러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신남성’들의 이면에 가로놓인 신경질적인 반응과 그 반응을 유도하는 경제적 위기를 짚어낸 <마침내 신남성이 도래하다>는 1984년, 가난은 언제나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통찰이 담긴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는 1999년에 쓰였다. 날짜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시차를 인지하기 어렵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지지 않기 위해 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지지 않기 위해 쓴다'

다른 한편으론 그의 글은 ‘언제나 새롭다’.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냉소적이지 않은 유머들로 가득한(물론 몇몇 문장들은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그의 문장을 키득거리며 읽고 나면, 마침표 앞에서야 뒤늦게 뼈 있는 농담 뒤에 있는 분노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천박하게 비웃지 않고, 세계는 달라져야 하고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유머는, 으레 유머가 해내는 역할과는 반대로 문장에 무게를 더한다. <애니멀 테라피의 빛과 그늘>의 “오래도록 짐 끌기 혹은 집 지키기 등 블루칼라 노동자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개들이 이제는 ‘테라피 개’와 같은 전문직을 가질 수 있게 됐다”와 같은 문장이 부적절한 계급의식이나 동물에 대한 오해를 조준하는 방식들처럼.

유머와 사유가 씨줄과 날줄처럼 짜인 그의 글에 마지막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체험이다. 물론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체험은 반성적이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장에 뛰어들지만, 그렇다고 현장에서 겪는 경험을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기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몰두했다가도, 다시 글을 쓰는 상황에선 “나는 진짜 빈곤을 겪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포로부터 안전하게 단절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현장의 생생함은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는 맹목적이다. 그러니 에런라이크의 이 책을 두고 “책상머리 엘리트를 향한 어퍼컷”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기실 절반만 옳다. 그의 칼럼, 르포 기사는 현장과 책상을 오가며 만들어졌다. 그 둘을 끊임없이 조응시키는 자세와 용기가 이 책을 가치 있게 만든다.

결국 정직한 저널리즘을 통해 파국적 위기를 막겠다는 절박한 시도들이다. 우린 이 ‘빌어먹을’ 세상에 계속해서 지고 있지만, ‘성화 봉송’이 끝나지 않는 한 패배는 없다는 희망을 읽는다. 강렬한 체험과 정확한 사유로 빚은 글 하나가 가끔은 이긴다는 가망 없는 믿음에 사치를 부려도 될까?  1999년 그의 글이 연방 단위의 최저 임금 인상을 이끌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8년이었다. 고독하게 견디기 쉽지 않은 시간이다. 동지들과의 ‘피크닉’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우직한 글들을 마주하며 노년의 저널리스트가 품었던 인내의 무게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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