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사연이 거짓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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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사연이 거짓이라면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1.07.2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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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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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내가 일하는 곳은 중장년층이 많이 찾는 음악 채널이다. 라디오 감수성이 두터운 5060대 청취자분들이 애청한다. 하지만 길게 보면 타깃 청취층을 아래로 넓히는 일이 중요하기에 최근에는 40대 청취자의 요구를 전략적으로 탐색해보고자 이런저런 기획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프로그램 제작진이 40대 청취자들에게 전화 인터뷰를 해보는 것이다. 들으면서 부족하거나 아쉬운 점, 혹은 더 살렸으면 좋았을 부분을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수렴해보자는 취지다.

우선은, 한 시간 이상 지속적이고 주의 깊게 프로그램을 접한 분들을 중심으로 인터뷰 대상을 선별해야 했다. 이때 주요 참조자료로 삼은 것은 문자와 SNS로 보내온 사연이다. ‘들을 만하다’와 ‘못 듣겠다’는 즉자적인 반응에서부터 이제 다음 곡명을 맞힐 정도로 선곡이 패턴화되어 있다는 지적, 진행자의 디테일한 톤 앤 매너, 중복 편성의 폐해까지 프로그램에 대한 날카롭고 생생한 평가가 담겨 있다. 청취자 여론을 살필 수 있는 주요한 리트머스 종이이자 신뢰성 높은 레퍼런스인 셈이다.

나름 고심하면서 인터뷰 대상을 고르는 와중에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의 대법원 판결 소식이 들려왔다. 댓글 조작 사건 하면, 2012년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이 자동적으로 따라 나온다. 한편에서는 정부 기관의 조직적 개입에 비춰보아 '드루킹'이라는 한 민간인의 범죄행위는 동일 선상에 놓고 저울질할 수 없다는 비호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국가가 사기죄를 저지르건, 민간인이 사기죄를 저지르건 사기죄라는 본질적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민간인이 공인의 사주와 공직 제안까지 약속받았다면 국정원이나 드루킹이나 그 둘의 구분선은 희미해진다.

김경수 경남지사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로비에서 시민들이 속보를 보고 있다. 대법은 이날 컴퓨터 등 장애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 지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뉴시스
김경수 경남지사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로비에서 시민들이 속보를 보고 있다. 대법은 이날 컴퓨터 등 장애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 지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뉴시스

여론이 조작에 어느 정도 취약한지 잘 가늠되지는 않지만, 선거판을 보면 쏠림이나 선동에 그리 강해 보이진 않는다. 운동경기 조작도 형사 처벌받는 현실이다. 크든 작든 조작은 경쟁자들의 페어플레이를 막는 룰 브레이커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뉴스들은 그 보도량에 비해 그리 큰 실감을 주진 못한다. 너 나 할 거 없이 한마디씩 쓴소리를 할 순 있지만 내 일상으로 가깝게 다가오진 못한다. 보통 이럴 때 실감 지수를 높이는 방법은 ‘상상력’이다. 

대표적인 게 미국 필립 하츠 박사의 경우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세상 인구를 100명으로 만든다면?”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었던 시절 이야기라 (지금은 79억에 육박하고 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사실은 그 당시 100명 중 70명이 문맹이고, 50명이 영양실조, 단 한 명만 대학교육을 받는다는 대목이었다.

대체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간격쯤 되려나... ‘실제와 인식’, 그 둘 사이의 제법 먼 거리 말이다. 그걸 확 좁히는 이런 류의 상상력은 사태의 심각성을 단박에 일깨우는 데 유효하다. 청취자 사연도 일종의 프로그램에 대한 댓글일 수 있다. 

“그 댓글이 어떤 의도로 조작된 데이터라면?” 매일 날카로운 표창 같은 댓글을 등에 맞으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예민한 진행자나 제작진은 댓글 하나로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댓글이 진실이 아니라면? 조작은 현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면서 이 왜곡을 통해 이해관계를 재편하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다. 인터뷰 대상을 추리면서 조작에 대한 ‘실감력’을 높이는 상상을 잠시 해봐서일까, 전화기 너머에서 어떤 목소리를 만날지 설렘보단 걱정이 살짝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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