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가치
상태바
침묵의 가치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1.08.27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방송 송출부에서 전화가 왔다. 사고로 지금 비상 음악이 나가고 있다고. “앗! 또야? 최근 방송사고가 잦아선지 짜증 섞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에서는 사고 이후 처리해야 할 번잡한 절차가 떠올랐고 송출부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뎠다. 장마 후 웃자란 풀숲을 헤집고 나가는듯한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클래식 음악 뒷부분에 조용히 연주된 파트를 방송 장비가 묵음으로 오인한 것이다. 송출 시스템은 18초 이상 묵음을 감지하면 사고 상황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자동으로 예비 음악을 내보낸다. 

수습 시절에 한 선배는 5초 이상 묵음이면 방송사고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말이든 음악이든 라디오에서는 소리의 간극에 인색한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의 공란을 대체할 다른 요소가 라디오에는 없다. 시각적 이미지조차 담을 수 없으니 침묵의 허용 범위가 협소한 셈이다.

며칠 전 관람한 한 편의 연극은 이런 점에서는 극단적이었다. 2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비언어극이었다. 대사 대신 배우들의 행위와 음향, 빛과 영상 등으로 극이 전개됐다. 생각과 달리 연극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간 대사에 집중했던 관람 방식에서 자연스레 벗어나 의상이나 무대, 조명과 음악에 한 번 더 관심이 갔다. 말의 부재가 말 이외의 것들을 새삼 돌아보게 한 것이다. 

간혹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의도적으로 널찍이 띄우면서 주목도를 높이기도 한다. 쉼 없이 나오던 음성이 제법 긴 휴지기를 두면 청취자는 순간 집중한다. “뭔 일이지?”라며.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가 없을 때 그 급작스러움은 확실히 환기성이 뛰어나다. 마치 다음에 디뎌야 할 계단이 느닷없이 사라졌거나 음표를 구현할 피아노 건반 하나가 쑥 빠져있을 때처럼 말이다. 뜻밖의 낭패감이나 당황스러움이 서서히 가실 즈음 서늘한 깨달음이 의식의 문을 두드린다. “그래, 맞아. 세상에 당연한 건 없지!” 무척 당연한, 그래서 잊고 있던 이런 현실 인식이 뇌리를 탕탕 친다. 

서태지 5집 앨범 중 ‘take six’라는 곡이 있다. 6분 15초 중, 중간에 2분가량이 묵음이다. 처음에 많은 이들이 이 트랙을 듣다가 CD 불량인 줄로 착각했다 한다. 4분 33초짜리 곡 전체가 무연주곡인 존 케이지의 음악은 침묵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한 고전적인 사례 중 하나다. 

나중에서야 뮤지션의 공백기를 묵음으로 표현했다거나, 공연장의 소음이 4분 33초 동안 연주되는 음악 자체라는 해석들이 덧붙여지면서 이런 시도가 향유자들 사이에서 수용되고 회자된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로 정의할 수 있는 이 퍼포먼스의 핵심은 무엇보다 예측불가능성이나 무예고성이다. 사고처럼 느닷없어야 충격이 배가되고 효과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사실,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무척 신기하고 신비한 현상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환경이나 언어든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존재는 실로 당연하게 그곳에 그 모습으로 꼭 있어야 할 당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매일의 반복과 습관이 ‘무언가가 있는’ 이 경이로운 사태를 딱딱한 각질로 덮어씌워 무감각하게 만들었을 뿐. 그래서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침묵이 금이다. 침묵은 또 다른 언어다.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자. 우리는 지금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싶은 건 아니다. 침묵이 새삼 도드라지게 다가온 건, 그만큼 말의 범람이 그 배경이 됐기 때문일 거다. 세상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다만 이렇게는 표현할 수 있겠다. 흘러넘칠 정도인데도 둔감해지면 위협적이지 않게 된다고.

사건 사고든, 예술이든 그 느닷없음의 날카로운 정으로 당연함의 껍질을 깨는 순간들이 가끔씩 필요하다는 것, 앞으로도 일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일상에 대한 내 태도는 그것 외에 바꿀 방법이 딱히 없어 보인다는 것, 그 두 가지는 기록해두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