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 않은 소수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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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47] '마이너 필링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일단 뭔가를 밝히면 작가의 사생활이 작품을 완전히 압도해버려. 그리고 나는 내 개인사가 예술을 장악하기를 원치 않아.”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 캐시 박 홍은 최종 원고를 수정하는 단계에서 친구 에린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언급한 대목을 삭제했다. 작가의 목소리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작가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대강의 ‘이미지’에 녹여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이 ‘이미지’의 위협에 더 취약하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들이 지닌 정체성에 따라붙는 환상에 손쉽게 용해된다. 개인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전에, ‘여성’ 작가, ‘흑인’ 작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라면 응당 할 법한’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존재로서 존재할 때에만 안전한 발언권을 얻는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가 <단일한 이야기의 위험성>이란 강연에서 말했듯, 여기엔 겉으로 드러나는 악의는 없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캐시 박 홍은 이 백인들의 순수함이,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능동적인 행위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무엇이 인종차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게 인종차별인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며 실재하는 차별을 개인의 성격 차원으로 축소시킨다.

저자는 소수 인종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실 인식을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불쾌한 감정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당사자의 자기 혐오나 파괴적 충동으로 귀환하는 상황을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한다. 예술적인 차원에서 소수자의 예민함은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정치적 차원으로 옮겨오면 자기혐오의 눈사태를 일으키는 균열이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다.” 백인들의 적극적인 무지에 동참하지 않은 대가로, 아시아계 미국인은 무언가 함께 어울리기에 불편한 사람,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라는 불명예를 얻는다. 납득할 수 없는 반응들이 계속되면, 자신의 예민한 더듬이를 부러뜨려야만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과도한 자기 규율과 끊임없는 '백인 되기' 시도는 이 소수적 감정의 파국적 귀환이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저자는 말한다. “만족을 모르고 사들이는 물질적 소유물이든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는 마음의 평화로서의 소속감이든 빌롱잉(Beloning)은 언제나 약속되며, 아슬아슬하게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우리가 유순하게 처신하도록 유도한다.”  현존하는 차별에 눈감고 산다면 언젠가는 ‘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의 다른 말이지 않은가? – 에 충실했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다른 인종의 ‘배신자’가 되었고, 그렇다고 그 믿음으로부터 보상을 얻지도 못했음을 간파한다. 약속은 지연되며, 연대는 파괴된다. 그것이 오늘날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처한 질곡이다.

저자가 “소수적 감정”에 시민권을 부여한 것은 연대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는 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마치 인종들이 명확하게 분리되는 것처럼 가정한 후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 이외엔 저작권이 없다는 식으로 굴며 서로의 ‘차선’위에서 안전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묻는다. 연대는 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스스로의 위치를 깨닫고 횡단하는 데에서 온다. “때로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경험을 상대방에게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경험과 문학과 사회에 대한 분석이 만들어낸 문단들은 비교적 성기게 엮여 있다. 문단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맞대어 볼 여유를 얻는다. 밀도 높은 문장은 트린 T. 민하의 “근처에서 말하기”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아시아계 미국인 일반을 대신하여 말하는 대신, 경험을 충실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덧댄다. 경험이 충실할수록, 이야기는 단일할 수 없다. 치밀한 문장과 성긴 문단은 여백을 형성한다. 

독자에 따라 공감하는 정도는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맞대어보는 과정이다. 공감하는 사람이 많고 적은 것보다 스스로 자기를 이루는 다양한 정체성의 층위를 확인하고, 어디에서 책과 이어지고 어디에서 끊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는지 여부가 더 중요하다. 서로 맞닿은 지점이 거의 없을 수도 있는 독자라도 이 책을 읽어보는 '경험'을 얻어 가기를 추천하는 이유다. 모든 독서가 어느 정도는 오독이라는 말은, 충실하게 서로의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는 점에서 옳다. 

LA 폭동을 다룬 대실 김 깁슨의 다큐멘터리 <4.29>를 언급하며 그는 말한다. “이런 자료가 없다면, 디폴트로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끊임없이 재생되는 로드니 킹의 구타 장면이나 회로 기판 같은 LA 시가지에 작은 화염이 점처럼 박힌 모습을 방송국 헬리콥터가 멀찍이서 촬영한 장면처럼, 언론이 대량으로 쏟아낸 이미지가 전부일 것이다." 매끈한 이미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얼룩’은 이 책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우리에겐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들이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송은 군림하기보다 ‘가까이에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단일한 이야기가 불가능하단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 사소하지 않은 목소리들에 반응할 용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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