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이별 통보에 대처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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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이별 통보에 대처하는 자세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1.10.04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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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제 사연은 언제 소개해주시나요?” 가장 빈번한 청취자 문자다. 여러 차례 사연을 보내도 방송에 소개가 안 됐다는 섭섭함이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써도 회신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요, ‘처음이니 그러지 싶어’ 몇 차례 더 보냈으나 함흥차사다. 

그러니 결국엔 풀이 꺾여 원망 섞인 문자를 보내온다. 그중엔 절연의 뉘앙스를 풍기는 작별 통지도 있다. “이 프로그램 앞으로 손절입니다.” 

회상해보면 입사 전, 나 역시 애청하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었다. 진정성을 담으면 당연히 소개될 거라는 ‘근자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소개는 되지 않았다. 덕분에 사연과 함께 자기 이름이 방송으로 호명되는 첫 순간의 흥분과 쾌감, 그걸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했다. 

무딘 성격 탓인지 청취자의 빈번한 민원성 문자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청취자 한 분이 직접 방송사에 찾아오셨다.

용무인즉슨, “오랫동안 사랑한 프로그램이라서 애정이 남다르다. 감춰둔 속내까지 털어놓으며 몇 차례나 손 편지를 보냈는데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올까말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 이렇게 찾았다.” 문자 이별 통보가 아닌 대면 이별 통보였다. 

제작자 입장에서 유구무언이었다. 그 자리에서 사연의 방송 적합성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편 마음속으론 ‘뭐 이런 일로 이 시국에 여기까지 찾아오나’ 싶었다. 나름 해원(解寃)을 하고 돌아서는 청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매일 겪는 이와 처음 겪는 이, 그 둘 사이에는 좀처럼 좁히기 힘든 사건의 질감 차, 입장 차가 있다. 사연 선별이 반복된 하루 일과인 나로선, 매 사연의 정성과 노고, 특별함에 둔감해지기 쉽다. 루틴인 그 일이 누군가에게는 하루 중 매우 특별한 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타성에 젖을수록 역지사지는 힘든 법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 입장에서는 무척 소소한 일로 여길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소소함이 생애 첫 순간일 수 있다는 것, 그 명료한 팩트는 같은 일이지만 서있는 자리에 따라 새겨지는 의미는 남다를 수 있음을 일깨운다.  
 
매일 아이를 받아내는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어제의 산모와 오늘의 산모가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순산을 돕는 것이 의사의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모의 마음은 그 반대편에 있다. 출산은 누군가에겐 생애 처음이자 삶의 가장 중대한 순간이다. 

훈련소 앞, 이발관 의자에 앉아 맞은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잘려진 머리카락을바라보는 입소자의 마음을, 다음 대기자를 빨리 맞기 위해 가위질에 여념이 없는 이발사가 깊이 공감할 수 있을까.  

오랜 염원 끝에 처음으로 자기 집을 계약하는 가족과, 하루에도 계약을 몇 건씩 처리하는 공인중개사의 입장은 또 어떤가.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내 일처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하자 없이 그리고 발 빠르게 대처하고 처리해야 할 매일의 반복되는 일들이 상대에게는 특별히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기억하고픈 두터운 마디의 순간일 수 있다.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다만, 가끔 떠올려 볼 뿐이다. 이내 잊히겠지만.   

여러 차례 보낸 사연이 무용하게 돼, 낙심 끝에 직접 찾아온 청취자에게 ‘참, 유별나네!’라는 잠시의 속내를 지그시 누르며 마음속에 한 번 더 새겨본다. 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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