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기', 눈먼 세상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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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기', 눈먼 세상에 고함
권력에 눈먼 자들, 그리고 보지 못해도 세상을 제대로 보는 홍천기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1.10.13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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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홍천기' ⓒSBS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 ⓒSBS

[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드라마들이 얼마나 현실 은유에 능통한가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사실 판타지나 가상 세계관을 내세우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정반대로 현실의 무언가를 은유하기 마련이다. 프레임 안을 통해 프레임 바깥을 보려는 것. 이게 없거나 잘 드러나지 않는 판타지 드라마는 현실성이 소거되어 유치해진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도 첫 시작부터 마왕을 등장시키고 그와 대적하는 삼신할망이 나왔을 때 불안감이 있었다. 심지어 선대왕에 깃든 마왕을 끄집어내 영종어용에 봉인시키는 과정이 CG로 연출된 광경은 마치 황당한 중국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불안한 기시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감을 지워준 건, 역시 이 드라마가 은유하고 있는 현실이 발견되면서다. 그건 바로 ‘눈’으로 대변되는 ‘본다’는 의미에 담긴 은유다. 

드라마는 눈의 은유를 여러 곳에서 활용한다. 눈은 ‘본다’는 의미로 어떤 존재를 살려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림에 눈을 그려 넣어 용이 승천하게 했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처럼 마왕은 눈을 가져야 비로소 활동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 주향대군(곽시양)이 어좌에 대한 욕망에 ‘눈멀어’ 어용을 불태우고 마왕의 봉인을 풀었을 때, 마왕이 활동하는 걸 막기 위해 삼신(문숙)은 마왕이 깃든 하람(안효섭)의 눈을 빼앗는다. 마왕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신 삼신은 그 눈을 어려서 마왕의 저주를 받아 앞을 못 보게 된 홍천기(김유정)에게 준다. 이로서 하람과 홍천기의 운명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홍천기>에서 본다는 것과 못 본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어좌에 눈이 먼 주향대군은 볼 수 있는 시력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의 눈을 가리는 건 욕망이다. 어좌를 얻기 위해 마왕까지 끄집어내려는 그는 그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걸 보지 못한다. 

반면 어려서 시력을 잃은 홍천기는 그럼에도 세상을 제대로 보는 인물이었다. 보지 못해도 세상의 따뜻함을 아는 이 소녀는 하람과 복숭아밭에서 뛰어 놀고, 하람이 일러주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마음으로 보며 즐거워한다. 하람은 주향대군 때문에 풀려난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눈(시력)을 잃는다. 

붉은 눈의 하람은 그래서 분노에 눈멀기도 하지만(마왕이 깨어나면 물괴가 된다), 하늘의 별자리를 볼 줄 알고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 홍천기를 먼저 알아본다. 가진 자들의 권력욕이 만들어낸 재앙(마왕)으로 핍박받는 것도 또 이에 맞서는 것도 서민들이라는 걸 <홍천기>는 ‘눈’의 은유를 통해 풀어낸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 ⓒSBS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 ⓒSBS

<홍천기>가 ‘본다’는 것의 은유를 통해 청춘들의 현실을 잘 담아낸 건 매죽헌 화회를 통해서다. 이 대회를 주관한 양명대군은 이 그림대회를 신분과 계급을 떼고 겨루는 일종의 블라인드 방식으로 치른다. 하지만 홍천기가 모작을 그린 범인이라는 걸 나비그림에서 알아채고는 의도적으로 그의 그림을 탈락시키려 한다. 

그러자 홍천기는 이렇게 말한다. “대군 나리께서 매죽헌 화회는 신분과 계급을 떼고 오직 실력으로만 겨루는 경연이라 하셨습니다. 헌데 그것은 다 듣기 좋은 말뿐이고 결국 대군 나리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물론 양명대군이 그를 떨어뜨리려 하는 이유가 불공정한 심사 때문은 아니지만, 불공정함으로 인해 인재를 알아 ‘보는’ 눈이 없는 현실을 이 대회는 에둘러 꼬집는다. 그렇게 탈락할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쌍이 홍천기가 그린 매화 그림에 앉는 장면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실력을 하늘은 보고 있다는 걸 판타지로 담아낸다. 

별다른 노력 없이 왕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권력에 눈먼 자가 만들어낸 재앙과, 그 때문에 눈이 머는 불행을 마주하면서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랑. 저들이 태생에 눈멀어 실력을 알아봐주지 않아도 세상이 알고 하늘이 알아봐주는 실력. <홍천기>는 눈먼 자들이 버려놓은 세상에서, 사실은 그 세상을 버텨내고 살만하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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